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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Nov 30. 2021

일터의 품격


“선생님, 저 이번 달까지만 출근하기로 했어요.”

“아니,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좀 쉬려고요. 너무 지쳤어요. 요즘 소화도 잘 안되고,”



수년 넘게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동료가 퇴사했다. 내가 근속 10년 표창을 받던 날, 얄궂게도 송별회도 진행됐다. 근속 10년 표창 심중소회心中所懷와 송별사가 동시에 진행됐다. 소회를 얘기하던 중, 난 감정이 복받쳐 올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감정에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10년을 묵묵히 버텨왔다는 자긍심보다 이제 자주 못 볼 직장 동료 때문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감추며 동료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렇게 내 소회는 울먹임과 주먹 한방으로 끝났다. 반면 퇴사하는 동료는 덤덤했다.


“지난 4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갑니다. 기회 되면 밖에서 봬요   




가슴에 사표를 품고 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퇴사 충동을 느끼는 직장인들이 많다. 실제로 구인구직 매칭 플랫폼 중 하나인 사람인의 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9명은 사표를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표 충동을 느끼는 빈도도 ‘한 달에 두세 번’(29.5%)이 가장 많았고 ‘하루에도 수시로 느낀다’는 응답이 22.7%로 바로 그 뒤를 이었다.


사표 충동 스트레스가 질병으로 이어졌다는 응답자도 무려 92.2%로 조사됐다. 이들이 겪은 질병으로는 최근 퇴사한 내 직장 동료와 같이 ‘만성피로’(56.4%, 복수응답)가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했다. ‘두통’, ‘소화불량’, ‘목 어깨 결림’, ‘불면증’, ‘우울증’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조사 결과에 나는 200% 공감한다. 사실 나도 이중 한 명이었다. 한때 사표 충동 스트레스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출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몇 해 전, 퇴사를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다. 어찌어찌하다 사표 철회로 지금까지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슴에 사표를 품고 출근하고 있다.




퇴사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우리는 직장을 박차고 나가는데 주저함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왜 이렇게 됐을까?’ ‘왜 나는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퇴사를 꿈꿀까?’, ‘왜 내 직장은 '밥벌이' 장소로 전락했을까?’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호드슨(Hodson) 교수는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확인하는 것에서 일터의 품격이 만들어진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인본주의 심리학자인 매슬로의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 욕구에 따라 동기화된다'는 주장과 맞닿아있다. 특히, 욕구 위계 이론의 4번째 단계인 존중의 욕구 즉, ‘인간은 자신이 높게 평가받고 존중받기를 원한다’와 맥을 같이한다. 일터에서 내 품격이 존중받을 때, 맡은 업무에 대한 주인의식이 발동한다. 그 주인의식이 일터의 품격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지난 10여 년간 이어온 등록금 동결 등에 따라 대학의 재정자립도는 악화되었다. 재정 면에서 내가 재직 중인 대학을 포함해 사립대는 사실상 ‘중증 환자’ 상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은 가치 증대보다는 임금 동결, 신규 직원 채용 0명, 부서별 예산 절감 등 원가 절감이라는 쉬운 길을 택했다. 대학 경영 위기 상황에서 택한 이 일련의 선택은 일터의 품격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있다.


다수의 정규직과 소수의 계약직으로 구성된 다른 부서와 달리 우리 부서는 소수의 정규직, 약간 명의 무기계약직, 프로젝트 계약직, 계약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칭만 다를 뿐 다수의 계약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황이 지난 10여 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대학은 성과만을 강조할 뿐 이렇다 할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먼저 꺼야 하니 어쩔 수 없음도 십분 이해한다.


구조적 열악함은 일터의 품격을 좀먹어왔다. 친형제보다 가깝게 지냈던 동료와 정규직 전환 건으로 뜨악해졌다. 회의 중,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동료의 의견에 비죽거리는 입, 감정이 섞인 날 선 피드백, 대면보다 카톡을 활용한 밍밍한 대화, 온기 없는 말, 한발 물러선 마음. 그렇게 각자의 밖에 섰다.  


물론 일을 둘러싼 외적 조건은 다른 부서와 다른 대학에 비해 나쁘지 않다. 그럼에도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없는 반복적인 일과 숨 막히는 분위기에 나는, 우리는 염증을 느끼고 있다. 이 염증은 무관심과 비자율적 업무 태도로 이어지고 있다.


업무 특성상 잦은 야근과 출장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피폐하게 했다. 동료들은 건강상의 이유로, 새로운 가치 있는 일을 찾아서, 계약 만료로 하나, 둘 떠났다. 그들이 떠날 때마다 자발성과 협업도 함께 떠났다. 그 빈자리엔 무례하고 개인적인 모습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소극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조직은 여전히 성과를 얘기한다. 국가 주도 사업에 선정될 수 있도록 더 힘을 내라고 독촉한다. 그 몰아붙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성과는 과연 얼마나 될까? 과도한 성과 요구에 동료 중, 일부는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내비친다. 나도 열심히 일하는 척 페르소나를 200% 발휘하고 있다.


일부가 자신의 사생활까지 포기하고 헌신하고 있다. 요즘 들어 이 동료들도 부쩍 힘들어한다. 평상시 술을 찾지 않는 실장도 요 며칠 계속 “술이 고프다”라고 한다. 중간 관리자로써 부서원들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 딱하고 안쓰럽다.




나는 떠나는 동료들과 남은 우리를 대하는 조직의 맨 얼굴을 보면서 내 미래를 읽는다. 다른 동료들도 나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업무 외에 자기 계발 등에 힘쓰느라 다들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는 거 같다. 품격을 잃은 일터에서 너도 나도 방관자가 되어가고 있다. ‘나만 아니면 돼’, ‘나는 몰라도 돼’라는 마음이 터를 잡았다. 가끔 궁금하다. 나만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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