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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Mar 17. 2022

마음을 온통 도배질하다


아내의 강의 일정에 운전기사로 동행했다가 그 지역의 한 서점에 들렀다. 매대 위에 줄느런히 늘어놓은 수많은 책들 중, 유독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녹색 바탕에 《쓰기의 말들》 은유 지음이라고 적혀있다. 특별히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표지 디자인도 없고 색상도 디자인도 밍밍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이유는 표지에 있는 구절 때문이었다.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글쓰기에 한창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어떻게 그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나는 글쓰기를 독학으로 배웠다. 처음부터 쓴다는 목적을 가진 건 아니었다. 시작은 읽기였다. 그러니까 독학이 아니라 독서였다.’(p.9)로 책은 시작한다. ‘이상하게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p.9)던’ 문장들에 밑줄 긋는 책 읽기. 그게 책 쓰기의 시작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뼈를 때리는 촌철살인 같은 문장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이 몇 문장을 읽고 바로 충동구매했다.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핑계가 보인다’고 했던가? 바로 결재를 하고, 그다음 문장을 이어서 읽어 내려갔다. 역시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온통 담고 싶은 내용이다.      


오래 기억하고, 쉽게 찾기 위해 늘 그랬듯 형광 색연필을 찾았다. '이런!' 가방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다. ‘가슴을 뜨겁게 달군’ 문장들에 밑줄 그으며 읽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음이 못내 아쉬웠다. 귀가 일정도 남아 있던 터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점을 나왔다. 귀가하는 차 안에서도 그 몇몇 문장이 계속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마음을 온통 도배질한 문장들을 잊지 않으려는 조바심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녹색 형광 색연필을 찾았다. 차 안에서 되뇌었던 문장들을 찾아 밑줄을 쳤다. 담고 싶고, 내 마음 같은 문장에 온통 형광 색연필로 도배질했다. 절실하게 와닿았던 문장들을 잃어버릴까 조급했던 마음이 비로소 놓인다. 밑줄 그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녹색 형광색과 함께 밑줄 그은 문장 속의 글자가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단어가, 문장이, 문단이 입체적으로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오롯이 감겨온다.            




언제부터인가 책을 읽을 때면 형광펜은 늘 내 곁에 있었다. 형광펜과의 동거는 대학 시절, 교내 문구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후로 지난 20여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형광펜을 처음 마주하던 날, 테스트용 형광펜을 들고 메모지에 연신 줄을 그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에 한 개씩 긋기도 하고, 두세 개를 동시에 긋기도 했다. 그중 가장 압권은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형광펜을 한 손에 쥐고 긋기였다. 그럴 때면 무지개가 하나 둘 그려졌다. 밑줄을 그을 때 나는 쓱쓱 소리도 이상하게 좋았다.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부분이 눈에 쏙쏙 들어오니 왠지 암기도 잘 될 거 같았다.   


그때부터 형광펜은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때면 늘 내 곁을 지켰다. 최소한 책이 비에 젖어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부분이 번지거나, 시간이 지나 밑줄 그은 부분의 색이 바래는 게 속상하기 전까지.       


나처럼 형광펜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알았을까? 몇 해 전, 형광 색연필이 내 앞에 등장했다. 형광펜을 처음 마주했던 날처럼 나는 한동안 문구점을 떠나지 못했다. 지금은 4색 형광 색연필이 내 책상 위에 놓여있다. 나는 그중에 녹색 형광 색연필을 애용한다. 눈의 피로를 줄여주는 낮은 채도와 명암의 녹색 형광 색연필. 이 녀석은 마치 오래 입어 목이 늘어난 니트처럼 오늘도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문장 전체의 호흡이 좋아 밑줄을 그을 수 없는 문단을 대면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형광 색연필 대신 마음으로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다시 펼쳐보곤 한다. 한때 절실하게 와닿았던 그 소중한 문장들을. 요즘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 중의 한 문단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읽고 쓰며 묻는다. 몸으로 실감한 진실한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앎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p.51)”


은유, 《쓰기의 말들》, 도서출판 유유,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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