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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Mar 01. 2022

민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


그날은 영 기분이 뒤숭숭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대학 동기를 만나기로 했다. 지난 몇 주 전부터 거의 매일 통화만 하다가 어제 드디어 약속시간을 잡았다.

“한봄아, 네 시간에 맞출게. 언제 시간 괜찮냐?”

“나야 뭐, 저녁시간보다는 낮 시간이 좋긴 한데......”

“그래? 그럼 점심시간에 볼까? 어차피 점심은 먹어야 하잖아!”

“그래, 12시까지 서울여대 남문으로 와. 학교 앞에 먹을 곳이 많지는 않지만......”

“밥이야 뭐, 거기서 거기지. 알았어. 내일 도착해서 연락할게!”

“오케이!”      


다음날.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동기에게서 문자가 왔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학교 앞 OO돈가스 집에서 기다릴게. 너 뭐 먹을래? 내가 미리 주문해놓을게!’ 

내 점심시간이 1시간밖에 되지 않으니 얼른 식사하고 본론으로 들어갈 심산이다. 

‘일찍 도착했네. 난 카레 돈가스! 점심시간 땡 하자마자 갈게. 조금만 기다려.’ 

회신을 하고 업무 처리를 2~3개 정도 했는데도 점심시간은 아직이다. 오늘따라 시간이 더디게 간다.      


박준현. 오늘 내가 만날 대학 동기다. 한동안 연락이 뜸하다가 참 오래간만에 연락이 닿았다. 몇 주 전에 연락이 와서는 다짜고짜 내가 가입한 보험을 분석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보험설계사가 된 지 딱 한 달째였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개인정보 조회에 동의를 해줬고, 오늘 그는 분석을 토대로 내게 보험 상품을 소개해줄 요량이다. 

    

돈가스 가게 창안으로 평상시와 다르게 말쑥한 차림의 준현이가 앉아있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하고 온 걸 본 건 그를 알고 지낸 이후로 거의 처음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하려 했지만 어쩐지 힘이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왼쪽 눈언저리가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내 신체적 변화를 눈치 채지는 않았을까 저어하며 그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다행히 모르는 눈치다. 준현이는 여느 때보다 차분했다.

“왔냐?”

“응, 오느라 힘들진 않고?”

“뚜벅이로 다니는 게 익숙해져서 뭐. 서울은 지하철이 잘 되어 있잖아.”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여기 나름 맛집인가 봐? 아까 주문을 했는데, 배달이 밀렸다고 아직이네.”

“금방 나올 거야!”       


우리는 주문한 메뉴가 나오길 기다렸다.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근황 토크가 우선이다.

“이제 사주四柱는 안 보는 거야?”

“보지. 사주카페도 계속 나가!”

“하던 거 계속하지 갑자기 보험은 왜?”

“사주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주기가 보이거든. 보통 10년마다 흐름이 바뀌는데, 사주에 따라 어떤 시점부터 흐름이 좋아지거나 나빠지거든. 물론 너처럼 큰 문제가 없는 사주도 있고. 이걸 우리 같은 사람들이 미리 예견해주고 상담을 하거든. 근데 가만히 보니까 보험도 그렇더라고. 지금 잘 나간다고 해서 내일도 좋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미래는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깐. 사주를 통해 그 사람의 길흉화복을 들여다보고 시기적절하게 보험설계를 도와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미래를 안전하게 대비하고 확보할 수 있도록 돕고 돈도 벌고. 북 치고 장구 치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그래서 시작하게 됐지 뭐.”

“아, 그렇구나!”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카레 돈가스가 빨리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내 식사가 나왔다. 식사를 하면서도 준현이는 줄곧 보험 관련 얘기를 쏟아냈다. 어떻게 한 달 만에 보험에 대해 저렇게 박학다식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는 매우 열정적이고 나는 매우 건성이다. 사실 나는 보험도 연금도 1도 관심이 없었다. 이미 필요한 실비보험, 건강보험, 생명보험을 다 들어놓은 터였다. 몇 해 전 대학 선배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무리해서 매달 20만 원씩 변액연금도 넣고 있는데 수익률은 계속 마이너스였다. 해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원금손실이 컸다. 무엇보다 선배와의 관계가 틀어질까 마음이 쓰여 울며 겨자 먹기로 매달 붓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빈 접시를 사이에 두고 준현이는 본격적으로 보험 상품을 소개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이미 마음을 정하고 나온 자리였다. 

“이 상품 어때?”

“생각해볼게.”

“너한테 딱 맞을 거 같은데......”

“미안한데, 지금은 여유가 좀 없네.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도 있고, 애들한테 들어가는 학원비랑 부식비도 만만치 않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계약직에서 이제 막 무기계약직 됐잖아. 정규직 되면 무조건 들게!”

“아,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봐. 이런 상품 다른 데는 없다!”

“하하, 알았어, 알았어. 와이프랑 상의해볼게!”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는 미래에 대해 나는 현재에 대해 무미건조한 이야기가 더 오갔다.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시간이 더디게 간다.      


오늘 점심은 그가 한사코 사겠다고 했다. 

“이렇게 뭔 곳까지 왔는데 그럴 수는 없지!” 

점심값을 계산하는데 어떤 고마움과 미안함과 짜증스러움과 짠함이 한데 섞여 올라왔다. 오늘 그가 추천해준 상품을 들어주지 못하는 대신 이 밥값으로라도 대신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를 민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일간 한봄일춘》 연재를 계획하면서 몇몇 글쓰기를 업으로 하거나 그러길 희망하는 지인들과 얘기를 나눴다. 어떤 지인은 “《일간 이슬아》의 아류 아니야?” 의구심을 표출했고, ‘마감’의 무게를 겪어본 어떤 지인은 “할 수 있겠어?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해. 그렇게 수명을 단축하고 싶어!” 걱정 반 우려 반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의구심, 걱정, 우려를 뒤로하고 ‘사서 고생 프로젝트’에 도전을 해보고 싶다. 그녀는 되고, 나는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녀에 비해 필력은 현저히 떨어지지만 “루틴이”의 삶은 살아낼 수 있다는 근자감은 있다.

      

“이 연재 계획은 모방이나 아류가 아닌 글쓰기에 대한 나의 진심이며 고유한 창작과정이 될 거야!” 

지인들에게 희떱게 씨불이며 우쭐대기는 했지만 이 계획은 지난 한 달째 보류 중이다.        


새해를 맞아 《어쩌다 일간 한봄일춘》 연재 계획은 세웠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이유를 더듬어보았다. 수년 전 보험 가입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나와 그 감정의 파편들이 문득 떠올랐다. 그 장면이, 그 감정들이 나를 주저하게 했구나! 어떤 고마움과 미안함과 짜증스러움과 짠함이 나를 붙잡고 있었구나! 불필요한 것의 필요를 집요하게 강요하려는 나를 본다.      


호언장담은 했지만 하루에 한편씩 글을 쓰는 것도 만만치 않을 터. 생각에 생각이 얹히고 또 얹히다 보니 속만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갈팡질팡 헤맸다.     


애면글면 용기를 내어서 구독과 관련하여 대학 동기들로 이루어진 단톡방에 카톡을 보냈다. 

‘《어쩌다 일간 한봄일춘》을 연재하려고 하는데 구독할 사람?’

‘어디에서? 유튜브?’

‘아니, 구독하면 e-mail로 보내줄 예정’

‘일간? 매일 보낸다고? 여력이 되겠어?’

‘음, 한번 해보려고. 올해 해내고 싶은 일 중 하나라. 한 달에 20편. 주말은 쉬고. 에세이, 시, 청소년 소설로 생각 중. 구독료 겸 격려금으로 월 1만 원 ㅎㅎ’

‘내용이 뭐냐?, 구독 경제로 넘어가는 겨? ㅎㅎ’

‘에세이(인간관계, 안부), 시(계절, 인생), 소설(청소년 성장). 넌 구독하는 겨?’

‘알면서.. ㅎㅎ 기다려봐. (아내에게) 상신上申 중’     

나와 우리는 어색하고 민망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줄여볼 생각으로 카톡 끝에 ‘ㅎㅎ’를 덧붙였다. 구독을 사이에 두고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마음을 더듬어본다. 아마도 대부분의 중년 남성들이 그렇듯 그들도 글쓰기에, 책에, 《어쩌다 일간 한봄일춘》에 1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나이가 아닌가? 그럼에도 내가 내민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러하듯 그들도 그동안 쌓아온 관계를 망치거나 나를 민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을 거다.      


《어쩌다 일간 한봄일춘》, 이 프로젝트로 기대를 저버리거나 민망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어쩌면 답은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월 1만 원의 구독료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들게 하면 되지 않을까? “읽는 이가 돈과 시간을 들일만한 것을 쓰고 싶어서 매일 저녁 하얀색 화면을 마주하고 두려움을 느끼”(p.534)는 이슬아 작가가 나도 되면 된다. 그녀의 고백에 없던 자신감이 갑자기 생겨나지는 않지만 먼저 이 길을 걸어본 선배가 있어 다행이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어떤 일이든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까? 글쓰기에 관해 나는 아직 최선을 다해보지 않았다. 퍽 다행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헤엄 출판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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