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는 건 내가 할게, 찾는 건 누가 할래?

프렌디, 아이와 함께 자란다

by 한봄일춘


딸내미는 게으르고 완벽주의다.

딸 안에 게으르고 완벽주의인 걸 싫어하는 내가 들어있다.


아들내미는 고지식하고 FM이다.

아들 안에 고지식하고 FM인 걸 싫어하는 내가 들어있다.


딸도, 아들도 그냥 아이일 뿐인데,

난 아이들 속에 들어있는 마음에 안 드는 아내와 아버지를 보고 있다.




MBTI. 2차 세계 대전 시기에 개발되어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성격 유형 검사의 하나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기에 나는 이 검사를 처음 접했다. 당시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승자의 들뜬 떨림이 섞여있는 선배들의 조언은 오히려 더 조바심 나게 했다. 현실적인 충고는 고마웠지만 달갑지 않기도 했다. 앞으로 펼쳐질 내 미래에 대한 충충한 조바심에 격려와 안내가 필요했다. 객관적인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때 MBTI를 만났다.


MBTI 16가지 유형 중, 나는 ENFP 유형이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대로다. ENFP 유형은 소위 스파크형이라고도 불린다. 외향적이며, 직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인식적인 유형이다. 이러한 기능을 주로 사용하는 나는 현실의 문제에 집중하며 그다음 순간을 기대하고 꿈꾼다. 장기적인 세계보다는 단기적인 세계에 집중한다. 내 행동에 명확한 확신은 없지만 현재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또한 믿는다. 이런 성격을 나는 선천적 기질이니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렇게 눙쳐 생각한다.


이런 성향 때문일까? 나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오는 정보를 직관적으로 해석하고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행동한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직감에 의존하여 주로 의사결정을 한다. 흔히 직감을 단순한 ‘느낌’ 정도로 생각하지만 나는 직감은 생각보다 훨씬 더 탁월한 답을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인생을 잘 살기 위해 주변머리도 좋고 활동력도 왕성하고 안면도 넓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지금'은 '미래라는 결실의 과정이다'는 가치관 덕에 '현재에 흩뿌려진 조각들을 미래의 퍼즐에 채워 넣는 걸' 즐긴다. ‘카르페 디엠’은 내 인생 항로의 부표다. ‘If it is not fun, why do it’, 이 문장을 만났을 때의 전율과 떨림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 고등학교 무렵 우연하게 접한 이 영화는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존 키팅 선생의 언행에 매료되어 인생의 롤 모델로 삼기도 했다. 지금에서야 내가 그를 롤 모델로 삼은 이유를 안다. 그의 내향 감정 특유의 공감능력과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또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는 모습이 나와 닮아있어서였다. 여북하면 대부분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이지만 긍정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그의 멘트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이런 성격 유형인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 특히 아내와 아버지에 대한 내 생각은 한결같다. 아내는 게으르고 완벽주의자다.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FM이다.


아내는 생각은 많은데,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때때로 게으름의 극치가 무엇인지 내게 알려주곤 한다. 물론 막상 실천을 하면 끝을 봐야 하는 완벽주의라 스스로를 혹사시킬 정도로 일에 집중한다. 강의 준비에 몰두하면 밤새 쉼 없이 일을 하곤 한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합리적인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에 매우 단호하시다. 자식들에게 인자하지만 원칙을 고수하고 충실하게 따르기를 강요하신다. 365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슈퍼마켓을 여셨던 아버지는 성실함을 강조하셨다. 그 덕분에 나는 학창 시절 본의 아니게 12년 동안 개근을 했다.


직관적이고 즉흥적이며 자유분방한 ENFP 성향인 내게 아내와 아버지는 늘 '제한과 타협'의 관계이다.




딸의 게으름과 완벽주의 성격, 아들의 고지식함과 FM인 성격은 내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 아내와 아버지의 모습과 맞닿아있다.


딸내미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보기에 소질도 충분하다. 매번 잘 그렸는데도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그려질 때까지 절대 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매번 그림 보여주기를 시뜻해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몰래몰래 훔쳐볼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 때문에 딸은 걱정과 부담감에 그림 그리기를 주저주저한다. 이내 게으름을 피운다. 지금 시작하고 나중에 완벽해지면 되는데, 매번 아쉬움이 하늘하늘 피어오른다. '잰 놈 뜬 놈만 못하다'라고 일은 빨리 마구 하는 것보다 천천히 성실하게 하는 것이 더 낫다마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아들내미는 무엇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논리적으로 설득이 돼야 행동으로 옮긴다. 자신만의 생각이 뚜렷하고 원칙을 고집한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하면 좋겠는데 원리원칙에 살고 원리원칙에 죽는다. 남 하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데 중뿔나게 혼자 고집을 부린다. 딱 맞고 벗어남이 없어야 한다. 나는 종종 아들한테 종주먹을 들이대지만 소용없다. 아들의 이 같은 진국스러움은 AM인 내가 넘기 힘든 산이다.




내 성격유형을 들여다보다, 아이들의 모습 속에 숨어 있는 나를 마주한다. 내 아이들 속에 숨어 있는 나를 들여다본다. 아이들은 그냥 아이일 뿐인데, 나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인데 손쉽게 아이들을 탓했다. 아이들은 그대로 완전체인데, 나처럼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갖고 있을 뿐인데, 내가 부정하는 것들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밤, 잠든 아이들을 보며 용기 내어 조용히 속삭인다.


"말하지 않고 읽지 않고 기다리고 들어주는 아빠가 되도록 더 노력할게! 얘들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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