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세 번 일정한 시간에 물리치료실을 찾아오는 환자분이 계신다.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고단한 몸은 쉴 틈 없다 하신다. 외식, 배달음식은 있을 수 없는 당신의 삶이 고되어 '이젠 좀 편하게 지내세요'하니 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제 환자분 뒤로 한 여인이 뒤를 따랐다. 춤을 추는 건가?
아니다. 나는 한눈에 장애를 안고 있음을 느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몸동작은 넘어지지 않을 정도의 걸음이 가능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누워 치료를 마친 후 나서는 뒷모습을 그제야 똑바로 봤다.
나는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환자분과 나와 나이가 엇비슷한 그분의 딸도. 하는 일이 이런데도 나는 내 눈에서 얼핏 연민이 비칠까 피했고, 어쭙잖게 과한 친절을 베풀까 머뭇거렸다.
환자분이 단단해 보였던 이유.
쉴 수 없었던 이유.
열이 나는 손녀 앞에 두 손을 맞잡고 밤새운 이유.
'5살에 열이 크게 난 후로 아팠어.'
자신이 돌볼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목련 나무가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중>
오늘도 환자분은 딸을 돕지 않고 들어섰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렸고, 아픈 곳을 직접 설명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환자분을 거치지 않고 딸의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직접 설명하는 딸을 바라보며 옆자리에 누운 환자분의 긴장이 풀리는 것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