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편식 극복기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러고 보면 나는 책과의 인연이 꽤 깊다. 초등학교땐 공부와 숙제를 싫어해 엄마가 줄줄이 사놓은 문학전집 읽는 걸 좋아했다. 중학교 땐 비록 하이틴로맨스 소설과 도통 모를 철학책을 끼고선 허풍에 절어 지냈지만 쿰쿰한 책 냄새 또한 사랑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나는 본격적으로 책을 가까이했다. 3년 내내 독서반 활동을 하며 책 대출을 해 주고 방과 후에는 라면만 먹고 독서토론을 했다. 고3 때는 자율학습 땡땡이를 치고 햇살 좋은 서고에 넉넉히 책을 깔고 낮잠을 잤다. 커튼사이로 나긋하게 바람이 불 때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수능문제는 안 풀어도 정독도서관은 밥 먹듯 다녔다. 그리고 대학교 다닐 땐 심지어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했고 마흔이 넘은 지금은 독서모임에 참여하니, 이만하면 나는 꽤 책과 친한 게 아닐까?
그런데 사실 나는 책편식이 심하다.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소설, 시 그리고 산문만 읽었다. 고등학교 독서반에서는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는데 선배들이 꽤 엄격했던 기억이 있다. 한 권의 책은 최소한 두세 번 읽어야 했고 독서토론 전에는 절대로 평론을 읽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숙제는 늘 시간에 쫓겨 전과를 베끼던 버릇이 있어서 처음에는 선배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왜 평론을 읽지 말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고 그 습관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그렇게 창작글 위주로 읽던 나는 자연스레 평론, 논설문, 설명문 등 인문학 근처에는 가지도 않게 되었다. 원래 좀 청개구리 기질이 있기도 하지만 객관적 사실의 글은 무료하기 그지없었고 생각을 전달하는 글은 마치 잔소리처럼 느껴졌다. 그 시절 나는 오로지 창작글만 읽었다.
대학진학 후, 약 1,2년 동안 연애와 동아리 활동에 빠졌던 나는 그마저 좀 지루해질 무렵부터 공부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속된 말로 엄마는 내가 늦공부가 터졌다고 했다. 그 무렵 본격적으로 어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더 이상 소설을 읽을 시간적, 심적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내 인생 처음으로 분단위로 생활했던 시기였기에 한가롭게 소설 나부랭이나 읽을 수가 없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내가 사랑하던 시와 소설을 끊었다. 다행인 건 중국어 소설과 시는 나에게 창작글 이전에 외국어였기 때문에 여전히 사랑할 수 있었고 그즈음 나는 중국어에 푹 빠져 지냈다.
창작글이 그리워진 건 최근 몇 년 일이다. 내 인생 20년 가까운 시간 속에는 소설과 시가 없다. 직장에 다닐 때부터는 심리학이 좋아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아이를 낳고부터는 각종 동화책과 육아서적을 읽었다. 아이가 발레를 배울 땐 발레 역사를, 그림을 그릴 때는 미술사를,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고부터는 클래식과 각종 음악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심지어 반려견 관련 서적도 많이 읽었고 건강 관련 실용서도 궁금하면 바로 읽는다. 심리학 서적은 지루했던 적이 없었다. 다만 소설과 시 그리고 산문은 읽지 않았다.
우리를 흔들고 동요시키는 것이 인생이며
우리를 안정시키고 확립시키는 것이 문학이다.
-개러드-
물론 여전히 시간은 바쁘게 흐른다. 다만 과거에 비해 지금의 나는 휴식과 업무, 노동시간의 발란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친구와 수다 떠는 시간도 소중하고 강아지와 산책하는 시간, 하물며 화분에 물 주는 시간도 기꺼이 허용한다. 실제로 과거의 나는 '똥손'이었기에 우리 집에는 살아남은 화분이 없었다. 나는 점점 마음의 여유를 찾기 시작했고 갑자기 창작글이 심하게 그리워졌다. 그러나 오랜 시간 인문학과 실용서에 절어있던 나는 소설을 읽을 끈기가 부족했다. 이야기가 좀 무료하거나 늘어지기 시작하면 책을 내려놨고 내가 좋아하는 문체가 아니라며 도저히 읽을 수 없음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이 간절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힘들겠다 싶어진 나는 독서모임을 찾아보기로 했다. 역시 한국인은 세계 어디서든 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한다. 나는 얼마 전부터 베이징 여성전문인회의 '책여위'라는 책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선정해서 읽고 쓰고 토론한다. 내가 책모임에 나간 가장 큰 목적은 책편식을 끊기 위함이었다. 책 선정이 자유롭지 못하니 자연스레 읽고 싶지 않은 책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굳이 싫어하는 책을 왜?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다름'과 '불편함'을 통해 성장하길 원한다. 게다가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유독 소설을 더 좋아한다.
이렇게 나는 책여위 덕분에 벌써 몇 권의 소설을 정독했고, 감동했고, 행복했다. 좀 뜬금없지만 수년간 드라마에 빠져있다가 최근 몇 년 다시 영화를 꺼내보게 된 것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드라마는 친절하고 충분히 가벼웠다. 나는 어쩌면 내 인생의 흐름이 달라진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상과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에 적응하느라 내려놓은 소설과 영화를 보지 못한 세월이 문득 아쉬워졌다. 시간을 촘촘하게 쓰느라 하늘도 못 보고 별도 못 본 게 아닐까 속이 상했다. 이거 이거 누가 소설 못 읽게 했나? 마치 소설책 금지령이라도 풀린 것처럼 이제 나의 상상력에도 날개를 달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