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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Apr 29. 2024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글

자기 검열의 시간


책을 멀리하라.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사람들도 멀리하라.
그래야 언제나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글을 쓸 수 있다.
-조지 버나드 쇼-



브런치 글 숫자가 곧 내 나이와 가까워진다. 내놓은 글이 여전히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이제 조금 글근육이 붙으려나보다. 하루를 안 쓰면 브런치가 그립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종종 내 글이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글쓰기 초반에 다양한 글을 마음껏 써 보자고 했던 마음이 조금 흔들린다. 혹 나는 조바심이 나는 것일까? 방향성 없이 하염없이 끄적거리는 내 글이 벌써부터 재미없다. 나는 실증이 빠른 사람인가? 이렇게 나는 벌써 자기 검열을 하고 있다. 


창작이란 무엇일까? 모든 글쓰기가 창작은 아니다. 최근 들어 내가 즐겨 읽는 인문서적 뒷장에 가득한 참고서적 목록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책은 셀 수 없이 많은 서적을 참고했고 친절하게 목록을 나열하고 있다. 물론 대놓고 짜깁기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내용은 절대 아니다. 궁금했던 내용을 나 대신 누군가 요목조목 잘 정리해 준 것이니 말이다. 이 역시 수고로운 작업이다. 마치 내가 석사논문을 쓰는 것이 힘겨웠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그중 저자의 새로운 논리와 사상이 담긴 책들도 많다. 다만 조금 혼란스럽다. 나는 문득 내가 얻은 지식이 내 것인가 라는 딜레마에 빠졌다. 괴변처럼 느껴지겠지만 말이다. 


논평이 곧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트르드 스타인-


과거 창작물을 즐겨 읽을 때 나는 평론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실제로 평론은 타인의 생각을 내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공감한다는 이유로 모방을 허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창작에서는 위험할 수 있다. 사실 브런치를 시작할 무렵만 해도 나는 타인의 글을 읽지 않았었다. 고전 또는 명작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글근육을 키울 수 있다고 단언했다. 물론 지금도 생각이 많이 바뀐 건 아니지만. 어느새 이웃글이 궁금하게 된 계기는 놀랍게도 브런치에 숨은 고수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였다. 그 밖에도 브런치에는 마음이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다. 따뜻했다. 


각설하고. 지식에는 지식재산권이라는 것이 있단다. 지적재산권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맞게 생겨난 용어이다. 다만 여전히 모호한 점이 많다. 나의 최대 관심사인 심리학 관련 책을 볼 때 특히 그렇다. 끊임없이 중복되는 내용은 내게 학습의 의미는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까다롭게 책을 고르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대략의 지식을 습득한 후에는 새로운 뭔가가 필요하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거나 지식의 환기 또는 연합이 필요하다.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당당히 써 놓은 글들도 반박할 자신이 없다. 지식에 공감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 같은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생각은 출처도 없다. 어쩌면 지나친 나의 검열일까? 


그 글이 쓴 것처럼 느껴진다면 다시 써라.
-미국 범죄 소설의 대부 엘모어 레너드-



기왕 검열을 시작했다면 가차 없이 따져보자. 얼마 전 '혼자 남으니, 쓰고 싶어 졌다'라는 글을 남겼다. 되짚어보니 조금은 뻔하고 추상적인 내용이다. 좀 더 솔직해지기를 스스로에게 권해본다. 보이는 것에 대한 부담은 사실 일찌감치 내려놓은 편이다. 내가 '더 이상 안 되겠다'라고 글쓰기를 마음먹었던 계기는 '할 말은 많은데 들어주는 사람이 멀어서'였다. 마치 잔소리하듯 간섭하듯 관여하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쉽게 말해 찾아가는 글이 아닌 찾아오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구독자 또는 좋아요 수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딘가 내 주소를 흘리며 홍보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오로지 누군가 우연히 내 글을 보고 나와 마음이 맞아서 좋아요 하트를 꾹 눌러주길 바랐다. 한 사람이어도 좋고 여럿이어도 좋지만 중요한 건 마음이었다. 내가 갖고 싶은 건 독자의 공감이지 인기가 아니다. 일단 분명히 해 두고 싶은 점이다. 


두 번째, 나의 글쓰기 주된 주제는 사실 '치유'였다. 내게는 기질적으로 구원환상이라는 오지랖이 있어서 일상에서도 타인의 마음과 연결되는 것을 중시 여기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 가까운 관계에서는 나의 그런 마음이 과해지는 순간이 있음을 발견했고 이는 결코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위에 언급한 '찾아오는 글'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알고 있는 심리학 지식과 좋은 에너지를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반복되면 무감각해지고 무의미해지는 경향이 있더라. 즉, 잔소리를 멈추고 싶었다. 그런데 글쓰기를 통해서도 이러한 부분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마음이 앞서 효율적이고 정제된 글을 쓰려다 보니 치유에서 필요한 '여백'과 '호흡'이 빠져버렸다.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세 번째, 서두에 말한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글'처럼 느껴지는 글도 문제였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담아내고 싶은 욕심에 나는 자꾸 논문식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더 나쁘게 말하면 짜깁기 글 말이다. 물론 뭐든 내 것이 아님이 분명하면 출처 밝히는 것을 잊지 않지만 그 밖에 누적된 지식의 출처는 밝힐 길이 없다. 다른 브런치 이웃들도 같은 고민이 있을지 궁금하다. 창작이라는 날것의 글을 쓰고 싶던 욕망은 어느새 서랍 속에 처박아두고.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나만의 목소리를 갖기 위해선. 
그 목소리가 전달될지 여부는 
잊어버려야 한다. 
- 앨런 긴즈버그-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한다는 말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 적용되며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 수많은 역사 속 작가들은 그렇게 글근육을 단련했다. 위대한 화가들 중 모작을 하지 않은 화가가 있었을까? 고흐는 가장 많은 모작을 시도했던 화가 중 하나인데 놀라운 건 그만의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또 어떠한가? 헤밍웨이는 "미국의 모든 현대 문학은 이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되었다고" 극찬했고 실제 수많은 당대 작가들이 이를 모방하며 미국 소설의 방향이 되어주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창작글의 모방이라면 말이다. 


나는 문득 내 글이 아직 창작의 문턱에도 못 닿았음을 깨닫는다. 조바심이 맞았다. 그런데 개인적인 조바심을 굳이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이유는 뭘까? 특별한 목적은 없다. 있다면 이 글을 쓰면서 느낀 점이 바로 목적이겠다. 자 그럼 나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지만
이제 그 기억은
내 마음이 뜯어먹기 좋아하는
좋은 풀밭이 되었다.
-조지 오웰-


조바심이 났던 스스로를 달래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묵묵히 글을 쌓아가는 것이다. 뭐든 시작을 결심하면 최소한 6개월은 일단 하고 보자는 평소 마인드를 적용해 보자. 다양한 글쓰기를 멈추지 말고 날것의 글과 정제된 글의 발란스를 맞춰보자. 내 것이든 네 것이든 일단 내 것으로 만들어보자. 나만의 글체를 갖는 건 조금 이른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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