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멜랑꼴리아를 보며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이라는 말은 참으로 흔한 말이다. 너무 흔해서 마음에 두지 않을 만큼 그렇게 자주 쓰이는 말. 자꾸 쓰이는 만큼 중요한 그 한 마디. 흥미롭게도 그렇게 우리는 그렇게 흔한 말에는 쉽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정작 그런 '한 사람'은 우리 모두에게 흔한 사람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쩌다가 그 흔한 말에 마음이 머물렀을까. 얼마 전 방영했던 tvN 드라마 멜랑꼴리아를 보던 중이었다. 극 중 수학 천재 백승유(이도현)가 지금의 세계적인 수학자가 되도록 지도해 준 지승유 선생님(임수정)에게 했던 대사를 아래 옮겨와 봤다.
"수학 좋아하니? 아닌데요.
이 문제 좀 풀어볼래? 제가 왜요?
이러던 놈이 상도 받고 책도 쓰고 (웃음) 많이 컸죠."
"네가 해 낼 줄 알았어.
아닌데요 제가 왜요 했지만.
니 재능은 숨겨지지가 않았거든"
"재능이... 아니에요."
"......"
"믿어주는 사람.
할 수 있다고 해주는 사람.
인생에 그런 사람 한 명만 있어도
해 낼 수 있어요. 모두 다."
마침 나는 러닝머신에서 뛰던 중이었는데. 순간 울컥해서는 그만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문득. 내 지난 4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내 인생에서 누가 날 그리 믿어주었을까 나는 떠올려봤다. 나를 가장 사랑한 부모님? 안타깝지만 부모의 넘치는 사랑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운 기대를 동반하고 믿음보다는 부담감과 불안을 생성한다. 우습게도 아이가 뛰어나 보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똑똑한 내 아이가 길을 잘 건널 것이라 믿지만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거듭 당부를 하고 그것이 되풀이되면서 믿음은 불안이 된다. 공부가 뒷전인 아이가 걱정되는 마음에 부모는 그런 자녀의 미래를 부정하며 겁을 주기도 한다. '너 대체 커서 뭐가 될래?' 대한민국 부모들의 대표적인 레퍼토리, 살면서 그런 말 한 번 듣지 않고 자란 사람이 있을까. 나에게 있어 부모는 틀림없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나를 믿어주는 바로 그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떨까. 나에게는 중학생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 가슴으로는 늘 딸아이에게 믿음을 주어야겠다 생각하지만 막상 아이를 대할 때면 믿음보다는 걱정이 앞서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잔소리를 하게 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제 아무리 커도. 아니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기대와 걱정이 앞서나 보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 걱정(불안)을 숨기고 든든한 지원자가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부모가 되어보니 이제 좀 알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결코 '아는 잘못'을 저지르는 어리석은 부모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면에서 부족한 부모일까. 잠시 내가 왜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지 못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내 경우 언제부터인지 늘 '최악의 경우'를 떠올려보고 이에 대처하는 멘털을 갖추는데 힘을 쏟는 편인데. 어쩌면 이 부분이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가급적이면 모든 경우의 수를 예견하고 냉정하게 대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런데 애초에 이런 마음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부터의 발견이고 다짐임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즉, 마인드 컨트롤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마치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깨달음은 각자의 몫인 것과도 같다.
나는 지금껏 '고진감래'의 깨달음을 꾸역꾸역 아이에게 퍼먹이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살면서 내가 어렵게 얻어낸 세상의 답들을 하나하나 아이에게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만함과 인내심 부재의 문제였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때때로 차라리 방임하는 편이 훈육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외로 매우 간단한 것을, 나는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안전하고 따뜻한 환경을 제공한 후 아이가 성장하기를 충분히 기다려주면 된다.
한편 믿음이라는 감정은 주는 쪽과 받는 쪽 쌍방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어야 맞다. 종종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나는 너를 믿어'라고 습관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정작 아이는 이를 믿지 않는다거나 조건부 믿음으로 여겨 부담을 느끼곤 한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 물을 무서워해서 수영을 못 하는 아이가 있다고 치자. 만약 부모가 그 아이에게 무턱대고 '나는 네가 수영을 잘하게 되리라 믿어'라고 말한다면 아이는 어떤 감정이 들까? 그 둘 사이의 '믿음'에는 무엇이 빠져있을까. 바로 '관심(사랑)'과 '소통'이다. 부모는 아이가 물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관심을 통해 알고 있어야 했고 소통을 통해 아직 수영을 배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야했다.
하지만 때때로 '관심'은 있으나 '소통'이 부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관심'의 방식의 문제일 수 있으니 검토해봐야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 아이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최소한 아이와 충분히 소통하고 있는 부모인 경우 '나를 너를 믿어'라는 말을 했을 때 자녀가 느끼는 감정은 부담 또는 불안감이 아닌 신뢰감과 이에 따른 책임감이어야 맞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긍정의 감정들은 아이가 건강하게 자신의 목표를 이뤄낼 수 있도록 작용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이 아닐지. 나는 그간 내가 부족했던 부분을 깊이 반성하며 아는 만큼 실천하는 부모가 되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사족을 달자면, 사실 아이를 믿어주는 마음에는 '약간의' 환상을 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이 부분이 내 경우 쉽지 않았다. 아마도. 앞서 말한 '유비무환' 정신 때문이 아닐까. 현실과 이상의 갭의 차이에 따라 때때로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은 심지어 기적을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가늠하고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