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같은 그날의 이야기
영화가 끝났다.
검은 화면에 흰 자막만 소리없이 오른다.
기계음과 녀석들 숨소리만 조용히 들린다.
불을 켜려는 녀석이 없다. 영화가 지루해 잠들었나?
큰 식당겸 강당에 빔 프로젝트 하나, 베개 베고 누운 놈, 그 놈 배 위에 머리를 얹은 놈, 그 발밑에 자리 잡고 누운 놈, 베개 하나에 비좁게 머리 얹은 두 놈 등, 서른 명이 얼기설기져 있다.
학급 캠프의 밤 프로그램, 영화보고 토론하기다.
각 방에 있던 이불과 베개를 들고 나와 거실같은 강당에 아무렇게나 누워 영화보기를 마친 참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작은 마을의 폐교를 수리한 쳥소년 수련관이라 영화가 끝이 나자 그야말로 까맣다.
처음 만나는 상황에 아이들도 고요히 숨만 쉰다.
수십 초의 까만 침묵이 흐르는 사이로 가만한 목소리가 들린다.
“철수야, 노래 하나 불러 주라.”
담임인 나는 덜컥.
철수가 누구냔 말이다. 동학년 녀석들이 다들 무서워하는 놈이잖은가.
그 녀석에게 노래 신청을?
개학을 며칠 앞둔 학년 교무실에서 진급한 학생들의 반편성이 끝난 봉투를 동학년 교사들이 하나씩 집어 들었다. 이 봉투 안에 일년 동안 지지고 볶을 녀석들 명단이 있다. 종이 하나에 건조하게 번호와 이름만 있다. 새로 학교를 옮겨서 아이들에 대한 정보가 아직 없다. 그냥 이름 석자만 본다.
그날 처음 본 짧은 머리의 여장부같은 학년 부장선생님이 학생 한 명을 찾는다.
“김철수, 몇 반에 있어요?”
우리 반 명단에 있던 이름인데, 왜 그러시지?
“김철수, 우리 반 학생과 바꾸자구요, 그 녀석이 학년 짱이어서 힘드실겁니다. 부장인 제가 맡겠습니다.”
아, 그렇구나.
“말씀 고맙습니다. 학년 일도 힘드실텐데 제가 그냥 맡겠습니다. 운명으로 생각하지요.”
어떤 녀석일까 상당히 궁금하네.
개학 첫날, 아직 어수선한 우리반 교실에 들어서니 한 녀석이 눈에 들어온다.
저 녀석이 김철수구나.
다가가서 교복에 새겨진 이름표를 흘깃 보니, 맞다.
숙련자의 눈썰미에 포착되었다.
작년 아이들이 뒷정리를 미처 하지 않아선지 교실이 지저분했다. 교실 청소를 먼저 하자고 제안했다.
첫날이라 눈치를 보며 슬쩍슬쩍 시늉만 한다. 사물함을 열어보니 지난해 흔적이 많다. 너무 많다.
지독한 냄새가 난다며 한 녀석이 소리를 질러 다가가니 우욱, 우유 썩은 냄새가 고약하다. 우유팩이 터져 사물함 안에서 그대로 썩고 있던 것이다. 걸레 찾아서 치워야겠네 혼잣말하고 잠시 후에 걸레 들고 와보니 ‘김철수’가 냄새나는 사물함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치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쪽 손은 바지 주머니에 집에 넣은 채,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 같은 시늉을 하면서 말이다.
이런 닭살돋는 착한 짓을 나서서 할 것 같아? 딱 이런 태도다.
귀엽고 웃겼으나 모른 체했다.
정리를 끝내고 첫 인사를 했다. 반가운 인사와 앞으로 학급 생활 전반에 대한 안내를 마치고 한마디 더 보탰다. 낯선 교실에서 첫 선물을 받았노라고.
썩은 내 나는, 남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더러운 곳을 청소하는 멋진 녀석을 보았노라고.
그리고는 양 손 바지 주머니에 넣고 의자 뒤로 몸을 반쪽이나 비딱하게 기울여 앉은 그 녀석을 보며 이름이 뭐냐 물었다.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물었다.
쭈삣거리며 대답하는 녀석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아이들 눈이 커졌다.
한 학기를 지내는 동안, 거친 행동으로 몇 차례 주의를 받기도 했으나 변화가 보였다.
주먹질이 없어지고 규칙 위반도 줄고, 수업시간에 엎드리는 숫자가 적어지는 등 말이다.
그래도 철수는 철순데... 그런 철수에게 ‘겁도 없이’ 노래 한곡 신청을 한 것이다.
아...어쩌나... 내가 나서야 하나.
그순간 나즈막하니 노래가 시작된다. 발라드가!
조용한 탄사들이 군데군데 어둠 속에서 들린다. 녀석들도 나만큼이나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노래가 끝나고 건조한 남학생들의 감출 수 없는 탄성이 이어졌다.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여전히 깜깜한 어둠 속에서 대단한 시도를 감행했다.
철수 노래에 고마운 인사를 좀 하지 그래?
고맙게도 영수 목소리가 들린다. “철수, 목소리 좋네.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겠는데”
이번에는 만호다. 철수의 무리와 동선이 별로 겹치지 않는 만호가 말을 건넨다.
“철수를 무섭게만 생각했는데 한 학기 지내보니 소문만큼 무섭지 않고, 웃긴 점이 더 많더라.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오호라~ 전혀 예상 밖의, 그러나 내심 바라던 내용이다.
영석이도 보탠다.
“맞아, 철수, 은근 부드럽더라고..하하하, 철수야, 노래방 가서 노래 더 불러주라.”
철수도 한마디 하셔야지요? 했더니, 김철수가 조심조심 말을 한다. 안할 줄 알았다.
“내가 올해는 애들도 많이 안 때리고 욕도 안하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될 때도 있어서 니들에게 미안해. 그래도 이렇게 좋게 말해주니까...(말을 잇지 못한다) 더 노력할게.”
멋지다!!
녀석들이 소리쳐준다.
까만 어둠 속, 엉켜 누워서 만든 장면이다.
영화 같은가?
너무 뻔한 영화 같을 것이다.
너무 뻔해서 보지 않을 영화 같다.
이 장면이 얼마나 오래도록 녀석들 기억 속에 머무를지 모르겠으나, 나의 기억 속에서는 지워지지 않을 것을 안다. 이렇게 튼튼하게 아이들은 자란다. 못미더워 하는 어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희들끼리 부대끼며 자란다.
후기
1박 2일의 학급 캠프 동안 음식 만들고, 설거지 하고 뒷정리 하는 곳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길동이는 다름 아닌 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