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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우동준 Jan 05. 2021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한 권의 책을 펼쳐내며

http://bu-rite.com/bbs/board.php?bo_table=sun&wr_id=3

(아래는 호밀밭출판사 연재플랫폼 bu-rite / '외부 칼럼'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새로운 시작에 앞서 가장 먼저 시도되는 건 언제나 흘러간 시간에 대한 ‘재정의’다.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지켜냈는지 점검한다면 새로운 시간을 채울 나만의 주제를 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검색창을 눌러본다. ‘코로나’와 ‘비대면’. 검색어 순위 상위권을 차지한 2020년의 키워드다. 그렇다면 나의 열두 달, 나의 지난 시간을 설명할 키워드는 무엇일까.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출간’이다. 어느 봄, 출판사 계정을 통해 짧은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온전한 소비자로 완성된 단행본만을 마주하다 직접 밭을 일구고, 햇빛과 물을 주는 경험이었다. 미완의 상태로 받는 평가는 어느 정도 자존감까지 내걸어야 하는 일이었단 걸 시작할 당시엔 미처 알지 못했다. 연속해 글을 짓는 시간은 나를 찾아가는 ‘구도’(求道)의 과정과 닮아 있었다. 조급한 내 모습, 고집부리는 내 모습을 발견했고 성장하지 않는 문장력에 매일 밤 좌절감을 느끼며 노트북을 덮던 나날이었다.       


글은 사유의 시각적 표현이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글을 쓰다 보면 다듬어진 ‘사유’가 아닌 거친 ‘내면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두괄식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고 재빨리 의견을 던지고 싶은 나의 조급한 성격을 드러내었고, 수동태로 맺는 어미는 강한 주장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나의 소극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팔로워와 소통하며 마주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감춰진 내 모습이었다.      


오래된 농부는 가꾸어진 밭만 보아도 상대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다고 했다. 한 번의 원고는 나를 포장할 수 있어도, 반복적인 글은 나의 고집과 습관, 태도를 낱낱이 드러내고야 만다. ‘아상’(我相)이라는 말이 있다. 몸과 마음에 실재의 `나'가 있고, 그것 역시 `나의 소유'라고 집착하는 생각이다. 그랬다. 연재는 완벽히 아상과의 힘겨루기였다. 바뀌지 않는 나의 습관과 힘겹게 마주하며 한 문장씩 뒤틀어가는 힘겨운 ‘수련의 과정’이었다.      

연재된 글과 단행본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글을 짓는 8개월 동안 ‘나 다운 글’이라 여기던 문장을 잃고 무척 혼란스러웠다. 4월에 시작한 초고는 결국 절반도 사용하지 못한 채 다시 써야만 했고 엄청난 스트레스로 잇몸에서는 피가, 두 달간 스트레스성 위염을 앓았다. 하지만 ‘에세이’란 생소한 장르를 통과했다는 경험과 쉽게 타협하지 않았다는 경험이 처음으로 ‘결과’가 아닌 ‘과정’에 시선을 두게 했다.   

       

호밀밭출판사와 함께했던 연재의 경험은 책의 결과가 아닌 나만의 책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흔히 빠름을 좇는 ‘데이터 시대’로 진입하며 느림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종이책은 정돈된 글을 공유하지만, 디지털은 작가의 개성과 습관, 그만의 문장을 노출한다. 아날로그는 결과를 공유하기에 적합하지만, 디지털은 과정을 공유하는 것에 특화되었다는 뜻이다.      


문화의 소비 방식이 변화되었다. 완성된 형태의 콘텐츠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브이로그로 일상을 공유하며 도전을 확장해가는 이야기가, 서툰 문장이어도 지속적으로 업로드하며 변화하고 성장해가는 스토리가 곧 독자와 창작자가 공유하는 세계관이며 상호 영향 속 새로운 창조성을 담보하게 하는 안정적인 토대가 된다.     


코로나와 비대면을 넘어 2021년이 주목하는 키워드는 ‘피봇팅’이다.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하나씩 가설을 시도해가며 방향을 유연하게 변경해간다는 뜻이다. 이는 변화를 리드하는 IT업계에만 해당하진 않을 것이다. 문장(text)을 빠르게 공유하고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 새로운 맥락(context)을 수립해가는 전략이 인문학에도 필요하다. 아니 종이책과 동네 책방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는 오늘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실험해야만 한다.      

브라이트는 숨겨져 있던 지역 작가의 문장에 빛을 비추려 한다. 그들의 고뇌와 존재에 주목하고 각자가 해오던 개별적인 작업을 공동의 플랫폼에서 새롭게 펼쳐 보인다. 나는 브라이트가 글을 소비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글을 창작하는 이들에게도 다양한 시선을 제공하는 시도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나의 경험처럼 자신의 글이 변형되고 다듬어져 가는 과정 자체가 창작자가 스스로 진화할 기회를 마련해줄 것이다.      


호밀밭에 뿌렸던 나의 작은 씨앗이 늦가을 한 권의 책으로 여물어 세상에 나왔다. 브라이트를 통해 응달에 감춰진 모든 작가의 활동에 빛이 닿아 힘차게 발아하길 희망한다. 지금의 시도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세상과 글로 소통하는 이들이 뿌린 씨앗의 미래를 기대하며, 미지의 영역이 가진 설렘을 기억하며 나는 오늘 밤에도 이곳의 글을 즐겁게 맛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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