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가족 자전거 캠핑] 삼랑진

2015.9.28

by 조운

여행기간 : 2015.9.28
작성일 : 2017.3.20
동행 : 네 식구
여행컨셉 : 자전거 캠핑








올해 5월 처음으로 시도한 네식구 전체 비박은 처음이자 곧 마지막이었다.
우리나라가 비박이 쉬운 나라(정확하게는 산에서 자리펴고 자는 게 불법이란다?)도 아니고...
한 가족이 모두 비박 가는 게 흔한 풍경도 아니지만...
비박의 즐거움을 가족이 다 같이 누리길 바랬으나, 산에 화장실이 없다는 크나큰 장벽에 부딪혀...
마눌님의 '비박 절대 불참' "인용" 판결을 받고 말았다. ㅜㅜ
그래도,


"신에겐 아직 4척의 자전거가 있사옵니다."


우리나라만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이 많고, 깨끗하게 관리되는 나라도 드물다 한다. 신문에서 읽었는데, 공중화장실이 생기기 시작한 개화기 이전엔 실제 여성들의 긴 출타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서울부터 공중화장실이 도입되면서 아녀자들도 바깥에서 한 시진 이상 보낼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여성 해방의 일등공신은 화장실이었다는...
우리가 자전거를 타는 동안 화장실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음을 역설하고, 모든 짐은 소인의 우마차(내자전거^^)에 다 싣고 마나님과 애들은 오로지 패달을 돌리는데만 신경을 쓰면 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캠핑은 추석 당일 바로 다음날로 잡았다. 우리에겐 대체휴일이 있으니까^^



자전거 준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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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을 위해서 새롭게 자전거 액세사리도 하나 추가.
안장 뒤에 달 수 있도록 고안된 미노우라의 물병 추가 케이지 어댑터다. 안장 뒤에 달면 짐대에 충분한 짐을 실을 수 없어서 연구를 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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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아버지 가게에까지 자전거를 들고가서 급 개조.
원래 짐대 바로 아래 후미등을 달도록 되어 있는 자리에 케이지를 어떻게든 달아보려는 게 오늘의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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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 블레이드에 달리도록 고안되다 보니, 약간 경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알미늄 재질이라 우격다짐으로 휘었다가는 끊어질 것 같아서... 아버지께 보였더니...
ㅎㅎ 바로 우격다짐으로 휘어 버리셨다는... 아, 이럴려고 내가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여기까지 왔던가하는 자괴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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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용접부위 바로 아래 얇게 크랙이 보인다.ㅜ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 아버지와 달리... 난 걱정이 많다. 과연 오프로드도 달려야 하는데, 500ml 두 병의 무게를 견뎌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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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그렇게 달긴 했다. 다양한 병을 수납하도록 토픽사에서 나온 폭 조절 가능형 케이지를 구매했던 건데, 이게 또 플라스틱 재질이라 주행 중의 진동으로 물통이 잘 빠졌다. 해서 없어보이지만 저렇게 고무줄을 달아야 했고...
언제 뭐 뽀대 뭐 이런 거 신경썼다고. 이대로 함 가보자.




목적지? 그런거 없다. 방향만 삼랑진쪽으로~


날씨도 좋고, 컨디션도 다들 최고조.
정말 정말 가벼운 폼 매트만 각자 자전거 뒤에 싣고, 나머지는 모두 내 자전거에 어떻게든 구겨 넣었다.
목표는... 정확하게 정하지 않았다. 지난 번([물금 캠프장] 우리 가족 첫 자전거 캠핑 포스팅- https://brunch.co.kr/@baramtago/85)처럼 화명동 방향으로 가면 또 텐트 칠 장소가 난감할 것 같아서 삼랑진 쪽으로 방향만 정했다. 적당한 곳 나타나면 거기서 자는 걸로.

조건은 화장실이 근방에 있어야 한다는 것^^.
상황봐서 가야진사 쯤이나 삼랑진 쯤이면 되지 않을까 정도만 정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가족 자전거 캠핑은 우리 가족의 마지막 자전거 캠핑이 되고 말았다.
이것도 그냥 마눌님의 불참 선언 정도였다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아주 큰 시련과 아픔, 긴 후유증을 남기고... 다시는 입 밖으로 자전거를 타자는 말도 꺼낼 수 없게 된...

사연이 길다. ㅜㅜ
그리고 출발 후 몇 컷의 사진을 제하고는 힘들고 지쳐서 사진도 없고, 이후에는 사진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긴박한 상황.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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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부터는 우리 애들의 얼굴에 모자이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애들이 아빠의 블로그에서 자기들 얼굴이 이상하게 표현된 게 더 싫단다.ㅜㅜ 커서 원망하면 어쩌나 생각도 했지만... 죄짓고 고해하는 것도 아니니 얼굴 노출되어도 상관없지 않을까라고... 대신 마눌님은 절대 싫다고 하니, 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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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차, 셀파가 있는 여행객의 저 낭창낭창한 뒷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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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작은 놈은 침낭을 실었네^^ 무게로 치면 도진개진이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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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피어있는~ 물금 둔치 어디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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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갈 수 있나?
가족 사진 한 방 남겨야지... 하지만 이게 마지막 사진이 되고 말았다.




삼랑진에서 고기를 취하다


철인3종 준비로 보통 호포대교에서 출발, 낙동강을 따라 가야진사를 거쳐 원동역까지 가서는 돌아올 때 천태산 언덕을 지나오는 훈련을 많이 했었다. 아니면 국도를 따라 통도사까지 찍고 오거나.
그렇게 갔다와도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아서 한 두배 정도의 시간이면 원동까지 충분하리라 봤는데, 아니었다.
덥다고.. 힘들다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계속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하지만, 어디 그런 곳이 있나?
원동쯤에서 자전거 길을 벗어나야 겨우 가게를 만날 수 있는데 그것도 그냥 지나쳐 버렸고...

어떻게 설득과 회유를 거듭해서리, 삼랑진에 닿았다. 삼랑진이 기차로야 물금에서 원동 다음 역이라 가까운 것 같지만, 행정구역상 밀양이다. 우리 애들은 모진 아빠 덕(?)에 자전거를 타고 시 경계를 넘어 온 게다.
점심을 거르고 쫄쫄 굶은 상태로 도착한 삼랑진은 마침 장날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크지 않은 삼랑진 읍에서 좀 붐비는 식당을 찾았고 북적이는 칼국수 집을 발견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모든 게 다 맛있었다. 포만감이 들자 급속도로 밀려오는 노곤함이 애들과 애들 엄마의 눈빛에 그대로 담겨있다. 더 북진하는 건(밀양부터는 서진이긴 하지만) 무리일 것 같아서 다시 가야진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해가 져서 가야진사까지 못가면 그냥 중간에 자리 펴는 것으로...
삼랑진을 떠나기 전, 그렇게 노래하던 아이스크림 하나 씩 입에 물리고, 먹고 있는 동안 정육점을 찾아 갔다. 묻는 사람마다 가르쳐주는 그 정육점은 친절하기도 하거니와, 생 돼지고기를 푸짐하게 담아주었다. 거기에 양념과 채파까지...
오늘 저녁 포식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다시 출발~



대 참사


가야진사가 보였다. 여기서 텐트를 칠까? 아직 해가 길어서 사람들이 많았다. 텐트는 그렇다고 쳐도, 취사를 하기에는 사람들 눈치가 좀 보였다. 어디서나 화기를 다루는 것에는 사람들 눈치가 보인다. 그럼 아예 시간이 좀 있으니, 다시 물금 둔치로 가서 오늘도 거기서 자는 걸로...

만약 그때 그냥 가야진사에서 텐트를 쳤더라면, 아니면 삼랑진에서 텐트를 치고 다음날 지친 아이들을 데리고 그냥 삼랑진역에서 기차타고 오자고 했더라면... 그날 저녁 나의 판단을 변경할 수 있었던 여러 지점들이 그 참사를 피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나를 괴롭힌다.

늦은 점심이긴 했지만, 분식이었으니 가야진사를 지날 무렵, 엄마와 애들은 다시 배고픔을 호소했다. 어차피 길은 하나 밖에 없고 내가 미리 가서 텐트를 쳐 놓고 밥 앉히고 고기까지 구워놓으면 도착하는 식구들은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마눌님한테 이르고 패달에 좀더 탄력을 넣었다. 힘껏 달렸다. 대충 30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식구들이 도착하기까지는 또 30분 정도 소요될테니, 텐트치고 밥 안치면 딱 맞춰서 밥을 내기는 빠듯하다는 생각. 그래서 더 열심히 달렸다. 오후 햇살이 서서히 빛을 감추고 점점 주위가 착 내려앉고 있는 자전거 도로를 전력질주하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느 때 같으면 모르는 번호를 안 받았겠지만, 이렇게 다급하게 목표를 향해 시간을 줄이려고 달리면서도 왠지 전화를 받았다. 아주 불길한 느낌과 함께.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아내 분이 자전거 사고가 나서 지금 길에 쓰러져 있다고 했다. 정확하게는 "낙사"라고 했다. 그 사람도 당황해서 단어가 헛 나왔겠거니 하면서도 전화를 바꿔 달라고 하니,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란다.

등으로 식은 땀이 흘렀다. 순간적으로 머리에 피가 공급이 안되는 느낌이었다. 정말 그랬다. 창백해진다는 말...피 공급이 안되서 그렇게 표현하리라. 왔던 길을 미친듯이 달렸다. 다리가 터질 정도로 패달을 저었다. 얼마 안가서 첫째 놈을 만났다. 아빠를 따라오겠다고 지도 나름 속도를 올렸던 모양이다. 아빠는 지금 빨리 가야하니까, 너무 속도 내지 말고 아빠 따라 오라고 하고는 또 달렸다.
저 멀리 마눌님 같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남자 둘이 서 있었다.

가까이 와서 보니, 아내는 통증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한 쪽에선 둘째가 쪼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금도 이 광경을 머리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엄마는 모로 누워서 가늘게 신음만 내뱉고 있고 꼬맹이는 너무 심하게 고통을 호소하는 엄마 옆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넋이 나간 채로, 지가 감당할 수준 이상의 충격으로 멍한 상태로 있는 모습.
이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난 이날 내 판단의 단락들마다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은 나 자신을 미워하고 후회하고 있다.

사고를 낸 총각은 경찰차가 오는 중이라고 했다.
경찰과도 통화를 했다. 워낙 차량 접근이 힘든 곳이라서 도착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고통스러워 하는 마눌님은 팔이 너무 아프다고했고, 여기저기 겉으로 찰과상이 보이고 바지는 한뼘 넘게 찢어져 있었다. 정확하게 어디어디를 다친 건지는 본인도 잘 알수 없는 쇼크 상태였고, 몸을 일으키거나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경찰이 선두에 서서 응급차를 대동하고 도착한 건 한참 뒤였다. 이미 해는 져서 주위는 어둑해지고 있었다. 부산대 양산병원 응급실로 아내를 먼저 보내고 경찰과 함께 사고 낸 사람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속도를 내고 달리는 와중이었고, 앞서가던 마눌님을 무리하게 추월하려다가 엉킨 사고로 보였다. 물론 이 남자는 빠져나가려고 노력을 하긴 했지만...

사고 경위는 차차 따지기로 하고... 이제 난 뭐 부터해야 하나? 애들은 또 어떡하나? 날은 벌써 어두워졌고, 환절기 무덥던 낮 온기가 가시자 반팔을 입은 꼬맹이들은 한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자체에 무서워하는 애들에게 계속해서 엄마는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고 있었지만, 정작 그 말은 나에게 거는 주술같은 거였다.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려고 애를 썼다.

나 혼자라면 병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도 앰블런스랑 비슷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애들은 그럼?
날이 너무 어두워서 더 이상 운행하기 어려운 애들 자전거를 어디 한쪽에 모아 두어야 할 것 같고, 애들까지 데리고 움직이자면 집에 가서 차를 들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곳까지 일단 애들과 함께 움직였다. 아까 내가 전화를 받았던 곳이다. 그리고 가방에서 점퍼를 꺼내서 입히고는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아빠가 차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컴컴한 밤에 이제 인적도 점점 드물어지고 있는 강가 풀밭에 애들만 두고 가는 건데도, 애들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고분고분 말을 듣는다.

아직 내가 체력이 고갈되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다시 죽을 힘을 다해 패달을 저었다. 이제는 한 시라도 빨리 차를 가지러 가야했다. 참 지금 생각하니... 처절했다.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렸다. 마치 마라톤 평원을 가로질러 그리스의 승전보를 전하고 장렬히 전사한 어느 병사의 심정이 이랬을까? 하지만 난 죽을 수도 없다. 아직 수습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통증이 극심해서 신음도 못 내는 아내는 홀로 병원에 있다. 병원에선 엄마가 신음하고 있고, 어둑한 강가에선 애들이 충격과 무서움에 떨고 있다. 그리고 길에서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고 있는 아빠까지... 우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날,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체력은 이미 고갈된 상태였다. 차를 끌고 아이들을 태우고 병원으로 갔다.
아내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았다.
왼쪽 손목 위 팔 뼈가 부러져있었다. 마치 부러뜨린 엿가락을 어긋나게 놓고 찍은 것처럼 뼈가 똑 부러져서 어긋난 채 뽀족한 조각들이 살을 찢어 놓고 있었다. 아내의 팔은 외부에서 보기에도 일자여야 할 팔뚝이 골절에 의해 꺾인 게 확인이 될 정도였다.

문제는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없었다. 추석 연휴라서 최소 인원만 있는 모양이었다. 빨라도 모레에나 수술이 가능하단다. 기다리시던가 다른 병원으로 가란다... 뼈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 참고 있는 아내가 안쓰러워 죽겠더라는...
진통제도 맞을 수 없었다. 오늘 다른 병원에 가서 수술 하기로 결정하면 마치를 해야하기때문에... 추천해 준 병원에 문의하니 바로 수술 가능하단다. 주섬주섬 아내의 옷가지를 챙겨서 우리 차에 탔다. 부산에 있는 그 병원으로 갔다. 시간은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갔다.

병원장이 휴일에도 쉬지 않는 병원이라 수술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아내는 잠시후 수술실로 이동했다. 지친 아이들은 엄마 침대에 뉘었다.

한 두 시간 정도 수술실에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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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뼈를 맞추고 그 위로 철심을 박았다. 철심을 길게 박아야해서 피부에 한 뼘 정도 칼을 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천국같이 시작했다가, 지옥같은 날이 되어버린 이날도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붕대에 감긴 팔만 봐야했고, 다음날 드레싱을 위해서 붕대를 푸는 순간, 나도 아내도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렇게 추석 명절 끝에 벌어진 사단으로 우리 가족은 2주 정도 생이별을 해야했고, 1년이 지나 다시 철심을 빼는 수술로 또 잠시 입원을 해야했으며, 지금도 아내는 후유증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 몸 중에서 골반과 팔뚝의 뼈가 부러지면 제일 안 붙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직 완전하게 붙지 않은 팔로 일상생활에서 많은 제약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게 무모한 남편이 무리하게 캠핑을 하자고 해서 벌어진 일이다. 저렇게 심하진 않지만 마눌님은 한 여름에도 맘편하게 반팔 셔츠를 입지 못한다. 팔에 저렇게 큰 흉터를 자기고 있는 스스로가 한탄스러운지 가끔 팔뚝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쉰다.

사고를 낸 당사자와도 원만하고 깔끔하게 정리가 되지 못했다가, 몇 번 경찰의 전화를 받고는 나중에야 미안하다고 선처를 바란단다... 그런 그의 비굴한 모습에 오히려 더 화가 나기도 했지만 되도록 원만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몰랐는데, 그 이후 철심을 빼는 재수술 등 당시 사고와 관련한 모든 의료서비스는 전혀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없었다. 아내는 평생을 저 흉터를 보면서 고통스런 기억을 상기할테고, 나도 쓰러진 엄마 옆에서 딴청을 피우던 어린 꼬맹이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텐데... 사고를 당한 입장에서 치료비도 계속해서 들고...
선처를 바란다는 그 총각이 하도 비굴하고 불쌍하게 스스로를 만드는 광경이 보기 싫어서 그만 쉽게 합의해주니... 이것도 별로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보통 갑질을 하고 삥 뜯는 수준으로 과한 보상을 요구한다는 소릴 많이 들었는데, 그까지는 아니라도 피해보상이라도 제대로 받을 걸 하는 후회도 되긴 했다.
철저하게 유물론자이지만, 이럴땐 좀 유연해져야 한다. 그래야 맘이라도 편하니까.
선을 쌓으면(적선) 그에 합당한 보상을 내 대에나 그 다음 대에서 보지 않을까 하고 위로하는 수 밖에...

마눌님은 뼈가 엿가락처럼 부러지고, 난 작년에 자전거 타다가 뒹굴어서 어깨 인대가 너덜너덜 해지면서 양쪽 어깨선이 짝째기인 채로 평생 살아야 한다. 혹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이게 아주 위험한 익스트림 스포츠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이 조심한다고 되는 것만도 아닌...
그래서? 이제 자전거 안타냐고?
우리 가족의 마지막 자전거 캠핑이라고 했잖아^^. 이제 마눌님과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자전거를 끊기는 쉽지 않다.
어깨 반깁스를 풀고 재활 훈련을 통해 다시 핸들을 잡을 수 있게 되자마자 눈물이 나도록 반가웠다. 사실 로우 핸들은 상체 무게가 팔에 많이 쏠리는데 어깨가 아파서 그 자세 자체가 잘 안되었으니... 다시는 핸들에 손을 얹지 못할까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계속 자전거 타는 량을 늘였더니, 이제는 다치기 이전 수준의 70~80%는 되는 것 같다.

달라진 건, 예전만큼 무모하게, 위험하게 타지는 않는다는 것. 아니 못한다는 것. 자전거의 스피드에 겁이라는 게 좀 생겼달까... 마눌님은 내가 자전거 타는 것도 여전히 싫어하지만^^

추가 : 우리가 삼랑진에서 취했던 양념 삼겹살은 사고 다음날 애들과 먹었다. 그날이 떠올라 괴로우면서 왜 그렇게 맛은 좋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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