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여행기간 : 2015.12.13
작성일 : 2017.3.23
동행 : J네와 우리 식구들
여행컨셉 : 나들이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그렇게 자주 가지는 않는다.
노통 서거 이후, 그래도 추모의 목적으로, 추모를 위한 콘서트 등의 참여로 가던 그 길을 이제 아이들의 체험 프로그램을 위해 더 자주 가게 되는 것 같다. 집 앞 고속도로로 김해까지 가는 새도로가 생겼다. 봉하마을까지 훨씬 수월해지기도 해서 더 자주 가게 되는 것 같다.
그 전에 참가했던 숲체험이나 화포천 생태 체험, 모내기도 좋았지만, 마눌님이 "쥐불놀이"를 한다는 말에 무조건 가자고 결정. 시골에서 자라지 않는 한, 언제 그런 경험을 해 보겠냐고.
노는 게 제일 좋아~ㅆ던, 어린 시절
내가 자란 곳도 도심이었지만, 동네에 넘쳐나는 아이들은 늘 놀 꺼리를 목말라했다. 정말 애들이 많았다. 학원이 없던 시절이니 어디 갈 때도 없고, 하교하고 집에 가방 던져 놓고 무조건 나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요즘 애들처럼 공차고 놀만한 곳이 많았던 것도 아니라서 주산학원, 태권도장 외에는 방과후 할 게 없던 아이들은 참 많은 놀이를 했고 개발해냈다.
사철 늘 즐기던 시마차기나 다망구, 진돌, 땅따먹기, 술래잡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오징어 달구지, 얼음망치, 말타기 등 나가서 친구만 있으면 맨몸으로 바로 할 수 있는 것부터, 구슬이 유행하면서는 구슬치기, 들공, 어찌니쌍을 즐기기도 했다. 로보트 태권V 류의 그림이 그려진 종이 딱지가 나오기 전에는 집에 있는 달력이란 달력은 죄다 뜯어서 만든 네모 딱지로 어마무시한 체력을 방전할 수도 있었고...
그 중에서 겨울철에만 주로 할 수 있었던 놀이가 바로 연날리기와 쥐불놀이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연도 있었지만, 보통은 오뎅집에서 먹고 남은 대나무 꼬치를 다듬은 것을 한지에 붙여 연을 만들곤 했다. 날리기도 어렵고 만들기도 어려운 방패연보다는 가오리연을 주로 만들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공을 들였던 건 연줄. 깨진 유리며 사기그릇이 있으면 동네 애들은 그 긴 연줄을 그걸로 무장했다. 애들이 이불청 꾀맬 때 쓰는 실(똥실이라 불렀다)을 주로 사용했는데 타래로 나온 면 실이었고, 좀 무거웠다. 연을 날리면 실이 쳐지기 일쑤.
그에 반해 어머니가 의상실을 하고 있던 때라 내 연줄은 아주 얇은 나이론 실을 썼다. 무게와 강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내 연줄은 늘 '연실끊기' 최종 우승자의 영광을 내게 선사했다.
그러다가도 옆 동네 애들과 단체전이라도 벌어지면 우리집 실들을 몰래 훔쳐나와서는 동네 친구들 모두의 연줄에 재료 혁명을 유발했다. 당연 우리동네 아이들은 최강팀이 될 수 밖에. 그날 저녁 엄마한테 두들겨 맞긴 했지만서도^^
무기는 재료 싸움이고, 군비경쟁은 필연인지라... 이듬해엔 전력 분석을 마친 옆 동네 애들도 모두 나일론 실을 사용하기 시작해서 최강팀의 위세도 다소 꺾였고... 여튼 그렇게 날려버린 연만 도대체 몇 개인지 모른다. 연날리기는 참 슬로우 플레이(내가 지어낸 말이지만)가 아닐 수 없다.
1) 우선 오뎅을 두 개 이상(실패할 수도 있으니) 사먹어야 한다. 그날 질 좋은 한지도 사야한다.
2) 다음날 대나무 꼬치를 칼로 다듬어야 한다. 집에 커터 칼도 흔하지 않던 때라 주로 과도나 거 날카로운 식도를 사용했다. 이날도 저녁 차리던 엄마가 무뎌지거나 이가 나간 식도를 발견하면 매 타작 정도 각오해야 했다.
3) 다음날엔 밥풀과 실을 이용해서 연을 만든다. 연 꼬리의 길이와 두께 조절도 중요하지만 실의 무게 중심을 약간 위 쪽에 두는 게 관건이다. 그래야 약한 바람에도 치고 올라가기가 쉽다. 그렇다고 너무 위쪽으로 묶으면 연이 돈다. 그리고 작업을 빨리해야 한다. 이쯤되면 벌써 날려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게 된다. 해 지기 전에 나갈 수 있으려면 바삐 움직여야 한다.
4) 실을 훔쳐다가(맞을 각오야 뭐...) 얼래에 옮긴다. 무조건 다다익선(더 많이 맞을 각오야 뭐...). 마음으로는 성층권까지 날릴 수 있을 것 같거든^^. 이때 깨진 그릇이라도 하나 구하면(그 나이에도 멀쩡한 그릇을 깰 정도로 시근없이 행동하진 않았던 것 같다^^) 옵션으로 뜨근한 아랫목에 실을 길게 늘어놓고 물풀이나 밥풀에 푼 사기그릇 가루를 먹이고 말리는 작업을 수일에 걸쳐서 완성해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연은 더 이상 그냥 연이 아니다. 거의 나의 분신이며, 재산 목록 1호로 등극한다.
근데 이 과정이 놀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슬로우 플레잉 아닐까.
쥐불놀이도 실제로는 논밭에 쥐불을 놓던 농경 생활의 실용적 목적에서 비롯된 놀이였을 것 같다. 우리 집이 도심 외곽이긴 했지만 주위에 논두렁 밭두렁까지 있던 그런 곳은 아니어서 실용적 목적은 사라지고 놀이감으로만 남아있는 형태였다. 쥐불놀이라 부르긴 해도 빈 깡통에 장작이나 숯을 넣고 밤 늦도록 돌리던 깡통돌리기를 많이 했다. 연날리기 만큼은 아니지만 이걸 준비하는 작업 또한 예사롭지 않다. 우선 빈깡통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분유 깡통이나 페인트 통이 딱인데, 당시 분유로 애들을 키우던 집은 많지 않았고, 조금 자라서는 철 깡통에 든 전지분유가 집집마다 하나씩 있었지만, 이 빈통은 엄마들에게도 나름 유용하게 재활용이 되는지라, 깡통을 두고 엄마와 경쟁을 해야하는 상황. 더 나중에는 비닐봉투에 든 전지분유만 사서 그 통에 다시 담아 쓰기 시작해서 흔하게 구할 수도 없어졌다. 페인트 통은 더 귀했다. 이맘때 동네에 하나 밖에 없는 페인트집 빈 깡통은 벌써 발빠른 녀석들이 다 채 갔고, 보통은 굳어있는 페인트를 망치와 큰 못을 이용해서 뜯어내야 하는 고된 작업을 동원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1인 1연의 소유방식과 달리 동네에 빈 깡통 한 두개를 다같이 공유하는 게 보통이었다.
어렵사리 구한 한 두 개의 빈 깡통은 우선 녹과 때를 벗겨내었다. 초저녁에 그 놈을 돌리면 황혼에 반짝이는 맛이 있어야 했기때문이다. 집집마다 사포는 다 있던 때다. 낡은 물건을 오래 써야 했던 시기라 때를 벗기거나 녹을 제거하는 철솔, 사포는 가정의 필수품이었거든^^
친구들이 다 같이 모여서, 못으로 구멍을 내고, 철물점에서 100원 어치 얇은 강철선을 사고, 인근 공사장이나 제재소에서 못쓰는 각목이나 대패가루를 열심히 날라다가 아지트에 모았다. 결전의 날이 되면 우린 그걸 들고 동네에서 제일 높은 언덕으로 올랐다. 따지고 보면 놀이적 요소는 별로 없다. 그냥 불을 붙이고 때우는 재미, 보통은 연소가 다 되어 벌건 알불만 남았을 때 돌리거나 그 위에 대팻밥을 넣어서 돌리면서 구멍 사이로 불가루가 날리는 걸 보는 게 놀이의 전부였는데, 경쟁과 보상이라는 놀이의 요소보다는 그 전 과정이 성취감을 주는 형태였던 것 같다.
그 시절 말타기하다가 뻑하면 치고 받고 싸우던,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하다가 움직였네 아니네 하며 말다툼하고 삐치고
그러다가 다음날이면 또 진돌 와중에 엎어져서 징징 짜던 그 친구들은
누구의 아빠, 엄마가 되어 있을거고,
큰 나무에 걸린 연을 무등 태워서 빼느라 몇날 며칠을 궁리하고 나무에 기어 오르다가 발목을 삐던,
호랑이 할매 집에 있던 이찌찌꾸(무화과)가 익어갈 쯤 밤 늦게 약속한 장소에서 그걸 서리하기 위해 모여서 작당모의하던
바로 그 친구들은 아직 아이들과 함께 연이나 깡통을 만들고 있을까?
연날리기
나도 늙어가는 구나. 어느새 옛날이야기만 하면 잡담이 많아지는 나이가...
보통은 모이는 시간이 아침인데, 이날은 놀이의 특성상 오후에 모이도록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봉하마을 안쪽 논 입구의 정자에는 우리 같은 가족들이 잔뜩 와 있었다. 맨 먼저 깡통에 넣어서 태울 소원종이에 가족들의 소원을 적었다.
해외 여행 두 번이라... 휴~
그리고 분유통보다는 훨씬 작은 깡통에 구멍을 내고 철사줄로 손잡이를 만들었다.
연은 살과 종이, 실을 나눠줘서 연날리기를 전도(?)하시는 유명한 강사 어르신(할아버지 또는 아저씨)이 독특한 방식의 가오리연 만드는 법을 전수해 주셨다. 어릴 때 이걸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오리의 양 끝 귀를 살짝 접어서 댓살을 고정하는 방식인데 실용적이고 더 튼튼했다.
그렇지. 본래 연은 이런 논두렁에서 날려야 제맛인게지^^
직접 만든 연을 날려보는 건 처음인 우리 꼬맹이들.
세상 진지하다.
바람이 많은 날이 아니었지만 전수자(?)의 말씀대로 잘 날아 올랐다. 얼래가 작고 조악한 점, 거기 감긴 실이 좀 짧아서 높이 올려 볼 수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했다.
집에 와서 실을 더 이어서 정말 하늘 끝까지 날려보자는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아직 이 연들은 우리집에 고이모셔져 있다. 쉽게 구입한 놀이감은 금새 흥미를 잃고 동시에 버려지는 걸 별로 아쉬워하지 않지만, 이렇게 직접 만든 건 버리기가 참 어려운지라... 시간을 내어 만든거나 시간을 돈으로 환전해서 산 거나 내 인생을 잘라서 얻게 된 건 동일하지만, 직접 투여한 것과 간접 투여한 것에 대한 애정의 차이는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리고 구입한 물건은 엄마나 아빠의 시간이지 지네들 시간이 투여된 것도 아니고^^
깡통돌리기 (쥐불놀이)
그러는 사이 해가 지려 했다.
연날리기가 겨울 낮 동안의 놀이라면 밤에는 깡통이다. 하루에 두 가지를 모두 해 볼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 의 아들 딸들이니까.^^
집집마다 한 두 개씩 나눠준 깡통에 지푸라기와 나무토막을 넣었다.
대략 어깨 넓이 만큼씩 다시 예의 그 논두렁에 서 있으면 진행자 한 분이 벌건 숯불을 통에 넣어주었다. 그 놈을 살살 돌리면 원심력으로 자연스레 지푸라기와 나무토막에 불이 올라붙었다.
애들은 손끝에 불덩이가 있으니 무서웠나 보다. 머뭇거리자, 애들 엄마가 먼저 나선다.
애들 엄마도 처음 해 본다며... 지가 더 신이났다.
엄마의 시연을 잘 살피던 녀석들 몇 번 해보니 재밌거든...
아주 신이 제대로 났다. 가끔 원심력으로 자리를 바꾸는 숯불이 통 안에서 부딪히면서 빨간 불가루를 날리는 맛이란...
이것도 약간씩 요령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과하게 빨리 돌리면 자칫 불이 꺼지거나 반대로 맹렬하게 불타오를 수도 있다.
너희는 좋겠다.
아빠 어릴 땐 늘 이런 놀이의 끝은 엄마한테 혼나는 걸로 끝났는데...
맞는 이유는 다양했다. 위에 열거한 거 말고도 단골 메뉴는 집에 늦게 왔다는 것, 저녁 먹을 시간만 넘기면 늘 맞아야 했다는... 혹여 옷에 불 구멍이라도 하나 생겼다간 그날은 사달이 났다 봐야지^^.
모인 아이들 중에서 그렇게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집에 가겠다고 조르는 애들은 한 명도 없었다. 이제 다시 집결지로 모이라고 해도 계속 하겠다고 우기는 아이들만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깡통마다 타다가 남은 숯불을 반 토막 낸 드럼통에 모두 모았다. 그리고 그물 철판 하나 깔더니 하나씩 떡과 대나무살을 나눠준다. ㅎㅎㅎ 이거 누구 아이디어 인거야, 엉? 이 조합 어쩔꺼냐고...
밤 늦도록 노닐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던 모든 가족들은 아쉬움 가득한 마음으로 마지못해 각자의 집으로 흩어져야 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모르지만, 참 괜찮은...
슬로우 플레잉으로 맛 볼 시간적 여유나 공유할 친구들이 전부 학원에 가 있는 요즘 애들한테 그나마 이렇게라도 하루만에 3코스 풀 세트 놀이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냥 전통놀이, 자연과 함께 하는 놀이를 경험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애 키우는 아빠 입장에서 고마운데... 정말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개발하고 친구들을 조직하고 불문율을 만들고 지키고 수정하는 것을 일상에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너희들이 하루 즐긴 색다른 경험은 사실 아빠의 어린 시절엔 일상이었고,
계절에 따라 친구들의 숫자에 따라 늘 새롭게 기획하고 조직하며 몰두해야 했던 본업이었고,
평생을 되새김질 할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었단다.
10대에 성공한 유투버가 되었다는 어느 아이의 기사,
드론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어느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너희들은 사고칠 계획을 하고, 말도 안되는 기획을 실행해보며 시행착오를 거치는 걸 스마트폰 밖에서, 전자제품 밖에서 찾고 누려보았으면 하는데... 아빠가 시대착오일까?
**동네에서 제일 친했던 5명의 형들, 누나와 함께 몇 달에 걸쳐서 밤마다 궁리하며 만드려 했던 독수리 5형제의 그 독수리호는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모든 것은 우리 5명 외에는 비밀이었다.
지구를 지키려는 우리의 계획을 악당들이 알게 되면 우리 가족이 위험하기때문에...
우리끼리 있을 때만 나를 "4호"라 부르던 그 형들과 누나는 국수집 창고에서 촛불 켜고 설계도와 재료 수집 계획을 빼곡하게 적었던 그 공책을 아직 기억할까?
매일 조금씩 모았던 나무 괘짝으로는 날개 한 쪽도 만들 수 없었다.
제트 엔진이니 하는 공학적인 방법은 전혀 몰랐고, 기체는 애드벌룬으로 띄우려 했던,
무모하기 그지없는 어린 아이들의 상상만 가득했던 그 공책은 어떻게 되었을까?
연락도 되지 않는 그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을 거야.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