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타고_사량도

2025.06.06

by 조운

수많은 ‘량’들이 그렇듯, 우리에게도 사연은 있다


여행기간 : 2025.06.06

작성일 : 2025.07.01.

동행 : 바야, 공, 담담

여행컨셉 : 섬 산행





육지가 바다 쪽으로 툭 튀어 나온 지형을 반도(半島), 우리말로는 곶이라 하고,

반대로 바다가 육지 쪽으로 쑥 들어온 지형이 만(灣)이다.

제법 가까이 있는 호미곶과 영일만은 상반된 모양새를 갖고 있다는 뜻.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모양새를 이르는 말 중에 량(梁)이라고 있다.

들보 위의 쥐나 도둑을 빗댄 사자성어, 양상군자(梁上君子)의 그 ‘량’ 되시겠다.

대들보나 다리(교량)도 뜻하지만, 해안 지형 중 마치 대들보처럼 다리를 놓기 좋은 곳이나 다리가 있는(있었던) 곳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어 쓰인다. 툭 튀어 나온 곶 앞에 망망대해면 그냥 곶인데, ‘량’은 곶 앞에 곶이 마주보고 있다. 다리를 놓는다면 딱 여기다 싶은 곳을 량이라 불렀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장군 3부작 모두에 이 “량”이 등장(노량, 명량, 한산)한다. 량에서 갑자기 좁아지는 물길은 다른 곳보다 유속이 빠르고, 조석에 따라 조류 방향도 급변할 수 있는 곳이라 그 변화무쌍한 흐름을 익히 잘 알고 있는 홈팀에게 무조건 유리할 수 밖에 없는 지형이다. 누군가, 이순신 장군의 가장 훌륭한 점이 질 것 같은 싸움은 아예 피하고 이길 것 같은 싸움만 한 거라던데, 나도 이 의견에 한 표. (이런 게 지장다운 면모지! 비겁하다 폄하할 지점은 아니라 본다)

여기에 더해, 조선 수군이 매복하기 좋은 지형, 소수의 판옥선이 좁은 물길을 막고 왜의 기민한 세키부네 대군을 상대하기 좋은 곳. 량만한 곳이 없다. 덕분에 ‘량’ 자 들어간 대첩들이 많다.

세 편의 영화에서 유일하게 ‘바다 위에 성곽’, 학익진의 한산대첩만 바다 한가운데 전투를 다뤘지만, 숨어있는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꾀어내는 작전에서 애초에 왜군이 숨어있던 곳 이름이 견내량, 지금의 거제대교 자리다. 적이나 아군이나 량이라는 독특한 지형에 상당히 의존했던 것.



통영 앞바다에 있는 사량도는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상도와 하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전형적인 량 지형의 섬이다. ‘사’는 섬에 뱀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부터 량 사이의 물길이 뱀처럼 보인다는 설, 상도와 하도를 뱀들이 줄줄이 헤엄쳐서 건넜다는 설 등이 있는데, 여튼 몇 번을 가봐도 아직 본 적은 없지만, 뱀이 많긴 하단다.

남해안 다도해의 섬들은 참 이쁘다. 해발 고도 0부터 급격하게 올리는 산세나 기암절벽 자체도 이쁘지만 그 산 위에 올라서 볼 수 있는 서라운드 뷰도 섬 산을 끊을 수 없는 이유다. 특히 사량도 옥녀봉 근방의 출렁다리 쯤에서 360도를 조망하면 마음이 참 착해지는 느낌마저.

섬 산행은 대부분, 별로 높지 않은 산들이라 누구나 해 볼만하고 산행 시간도 그렇게 길지 않다. (그렇다고 해발 0에서 출발, 급경사를 오른다는 게 만만치는 않지만)

통영하면 바다. 섬도 참 많다. 그런데 의외로 해수욕장은 달랑 3개 뿐이란다. 그 중 하나가 사량도에 있는 대항해수욕장이다.

여름이면 대항해수욕장 캠핑장에서 텐트치고 하루종일 수영하고, 다음날 사량도 지리산(지리망산, 지리산을 바라볼 수 있는 봉오리라는 뜻이라는데 ‘망’자 떼고 그냥 지리산으로 굳어졌다, 어차피 지리산에는 지리산이라는 봉오리는 없어서… 지리산 주봉 이름은 천왕봉) 종주 후 금평항 근처에서 물회 한사발 들이키면, 모히또 가서 몰디브 마시는 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는 거.

몇 년 전 상도와 하도 사이에 교량(사장교)을 설치해서, 자전거로 상, 하도를 라이딩하는 인구도 제법 늘었다. 전국에 많은 트라이애슬론 경기가 개최되지만 공식 국제대회 위상면에서나 참가자 규모면에서나 단연 으뜸이 통영 철인3종 경기(사량도에서 하는 건 아니고 통영시 도남동 일대에서 개최된다)인데, 거의 섬처럼 어항 마을과 고갯마루가 드라마틱하게 이어지는 코스의 매력 덕도 크다고 본다.

사량도 자전거 일주도 고도가 급변하면서 기어를 수시로 바꾸는 재미나 그에 따라 변칙적인 패달링을 해야하는 맛과 시원한 맞바람이 주는 재미가 제법 짜릿하다. 하도의 특정 오르막 구간은 역대급이긴 하지만…


배고프면 마을에서 해산물 사 먹고, 물빛에 반하면 뛰어 들어 땀도 좀 식히다가 나와서 샤워하고 (포구 마다 화장실에 별도로 샤워기가 부착되어 있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거기서 샤워하고 가라고 알려주시더라), 그렇게 8자 모양으로 한 바퀴 일주하면 딱 당일치기 코스로 적당하다.

결혼 초 처가댁 어른들 계모임 따라 처음 방문하고 모두 잠든 새벽, 당시 새신부셨던 분을 대동하고 계획 없이 올랐던 옥녀봉, 불모산의 절경들은 잊을 수 없다. 가슴이 벌렁벌렁 하던 시절이었고, 벌렁벌렁의 원인 제공자와 함께라서 더 그랬을 수도… 그 이후 사량도 왕팬이 되었다.


사량도2.jpg


그때 본 충격적인 장면 하나.

막 일출이 시작된 시각 쯤, 출렁다리 양 끝에 있는 테라스라기에는 좀 큰 정도의 나무데크에 몇 개의 텐트가 이슬을 맞아 반짝이고 있었다. 여성 두 분이었다. 텐트 지퍼만 내리고 손에는 커피, 다리는 허공에 늘어뜨리고 먼 바다를 바라보던 두 분의 여성 백패커의 멍때림에 가까운 그 편안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순식간에 뭔가 땅 하고 때리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부럽다는 느낌 정도가 아니라, 인생관에 쩍하고 금이 간 느낌, 잘 익은 수박 겉에 칼을 넣으면 쩍할 때의 바로 그… 제법 일관되고 단단했다 생각했던 삶의 목적에 대한 근원적인 균열과 함께 오는 허무함… 이어지는 환희…

앞으로 이토록 찬란한 장소에서 이렇게나 찬란한 아침을, 저렇게 덤덤하게 누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하는… 그러면서 쩍하고 벌어진 실금 사이로 스며드는 희망이 거의 동시에 몰려왔다.

‘그래 내 삶의 주인으로 살자. 우선순위가 바뀐 것 같다고 공표하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기에 동참하겠냐고 다시 물어보자.’

물론 그 이후, 그 사랑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 남자가 갑자기 백패킹 장비를 사더니 산 속에서 혼자 자고 오는 이상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정도의 아주 지엽적인 작은 실천 한 두개만 보였겠지만. (삶을 충만하게 살겠다는 내면의 소리에 집중 한다거나 그걸 또 실천하는 작은 습관들은 남들에겐 잘 안보일 수 밖에)


이쯤에서 한가지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듯.

우리나라에서 그 어디가 되었건 자신의 사유지 아닌 곳에서의 풍찬노숙은 불법이다(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긴 한 것 같으면서 아닌 것도 같은 참… 중국은 반대로 국립공원 등의 국유지는 합법, 그 외에는 불법, 일본은 도심 속 노숙은 불법, 국립공원을 포함한 대자연에서의 노숙은 자기 책임하에 자율. 인종적 문화적 유대감이 깊은 극동 3국의 규제 방식과 책임에 대한 인식 차가 상당한 점은 또 기회가 되면 다뤄보기로 하고, 패스…)

여튼 그날 짧은 순간의 감흥을 말로 푸니까 상당히 낯 간지러운 의미부여가 되어 버렸는데… 다 떠나서 “낭만”에 눈을 뜨게 해 준 계기였던 건 확실하다. 낭만을 알게 되었다, 보다는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찾으러 다녀야 한다는, 찾아 다니는 것 또한 낭만적으로다가 해야만 한다는 느낌?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이 즈음부터 최백호 아저씨가 좋아진 것도 같고^^



결국 2~3년 전, 버킷리스트 한 문장에 빨간줄을 그을 수 있었다.

대항에 텐트치고 하룻밤 자고,

아침부터 대항에서 상-하도 연결한 다리 근방까지 바다수영으로 에너지 쫙 함 빼주고

출렁다리로 올라와서 잃어버린 낭만을 오롯히 내 추억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실제 기분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풍부했다. 말로 전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바다 한가운데 있는 바위섬 등대 꼭대기의 등대지기가 된 느낌'?

화룡점정은 당연히 아침에 커피 내려 마시기라 생각했는데, 정확하게 딱 그 포인트는 아니더라고.

오히려 최고의 감격 포인트는,


‘텐트의 지퍼만 열고 맨발에 반바치 차림으로 엉덩이로 밍기적 거리면서 난간 끝에 앉는다.

무릎 아래를 낭떠러지에 늘어뜨리고 물이 끓는 동안 멍하니 바다만 바라 본다.

천천히 커피를 내려서 난간에 턱을 괴고 철컵에 가득 담긴 커피향을 조금씩 느낀다.’


10년 넘게 아주 구체적으로 시물레이션만 했던 바로 그 버킷리스트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리마인드 하면서 똑같이 재연하고 있는 나를 인지했던 그 순간,

10년 전부터 벼르고 다듬어서 정제시킨 마음 속의 명령과 거의 일치하게,

그렇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다는 자각의 순간,

그토록 갈망했던 주인된 삶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상당히 대견하고 스스로 뿌듯한 그 찰나가 가장 감격스러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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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량도행은,

내가 진행하는 이벤트의 평균 타율을 신뢰하는, 그래서 있던 약속까지 미루고 이벤트에 동참하기도 하는 후배 한 명과 무릎 관절 때문에 늘 병원 예약하고 따라오는 단골 술집 사장님도 합세했다.

출발일 이틀 전인가, 톡으로 “갈래?” 하니,

바로 “네”

^^

아마 이들도 주인된 삶을 살라는 어떤 명령같은, 수박이 쩍 갈라지는 어느 순간을 경험한 이들이 아닐까 싶다. 고맙게도 내 주위에는 이런 “수박쩍” 부류들이 좀 있다. 이런 건 굳이 묻거나 하지 않아도 느낌적으로 알 수 있거든.

사량도는 배시간과 섬 내 순환버스 시간이 서로 사맛디 아니할 때가 있다. 미리 체크해야 시간 활용을 잘 할 수 있다. 더구나 상도를 도는 버스는 오전엔 시계방향, 오후엔 반시계방향으로 순환한다. 세심하게 출발 및 산행 시간 계산하고 움직여야 당황하지 않는다는 거.

물론 동행한 세 분의 여성들은 이런 거... 모른다. 한 명만 정신 차리고 나머진 칠랑팔랑 오롯이 좋은 거 하나라도 더 눈에 담는 데만 집중하면 되니까.

이렇게, 같이 사는 분까지, 절친한 여성 세 분을 모시고 하는 등산이라고 해도 딱히 배려, 감정노동, 그런 거 없다. 평소보다 속도 조금 줄이고, 가끔 가랑이 찢어질 것 같은 코스에서 손 한 번씩 잡아주거나, 사진 좀 찍어봐바바~ 하는 명령 좀 더 자주 듣는 정도?


십 수년 전, 절벽을 오르며 “꺅~” 소리와 함께 “무서워~” 하던 그때 그 호리낭창 했던 새신부는 아쉽게도 이제 영원히 나의 이벤트에 동참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때처럼 꼭대기에서 하도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 어린 새신부 대신 중년 여인이, 아무것도 없던 바다에는 거대한 사장교가 생겨있다.

사진 속 중년 여성은 없던 흰머리 쬐금에, 살짝 살집도 좀 는 것 같기도 했지만,

미소 만큼은 그때 그 새신부와 똑같았다.

'무릎 성할 때 더 많이 댕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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