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26
여행기간 : 2014.10.26
작성일 : 2016.11.24
동행 : 가족과
여행컨셉 : 나들이
노무현, 봉하...
노대통령이 은퇴하고 고향 봉하마을 사전로 간 뒤, 방문객들이 집앞에서 "나와라~"하면 하루에 5번 씩도 나오곤 했단다.
마눌님이 한 번 가자고 할 때,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뤘다.
당시는 이명박대통령 당선에 그의 어정쩡한 정치적 태도도 빌미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화가 나 있기도 했고, 노대통령 측근 뇌물수수 등이 터졌을 때는 민주 진보 진영 전체를 손가락질하도록 만들었다는 것 자체로도 애증을 느끼던 때 였다.
서거 소식에 일주일간 울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미안함과 후회였던 것 같다.
원칙을 지키지 못한(파병문제가 가장 대표적이겠다) 몇 가지 정책 결정에 실망하고 화냈던 게 미안해서 그랬던 건 결코 아니다. 지금도 그때의 결정에는 동의할 수 없으니까.
아마 측근의 뇌물수수 사건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던 시기, 그를 옭아매는 기득권의 계략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는 것만으로 그를 폄하했지만, 단 한번도 그를 옹호하지 않았던 내 자신이 너무 후회되어서 그렇게 목놓아 울었던 것 같다. 내가 그를 자살로 몰고 간 사람 중에 하나라는 생각때문이었던 것 같다.
처음의 후회는 분노로 바뀌기도 했다. 바보같은 사람이라고, 조금만 더 독하게 견디지 않고 왜 그랬냐고 욕을 해대면서 그렇게 그 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 했으리라.
그리고 마음을 추수르기도 전에 추모 문화제에 사용할 영상을 울며불며 일주일 밤을 새어 만들어야 했다. 그의 기일이 다가오면 당연한 듯 그렇게 몇 해 동안 추모문화제에 사용할 영상을 만들었다.
눈물은 마르고, 이 나라 통수권을 사익을 위해 사용하면 얼마나 해 먹을 수 있는지를 교과서적으로 보여준 이명박 대통령 시기도 지나, 이제는 그따위 대통령 마저 그리운(?) 시기가 되어버렸다.
2002년 대선 기간에 한 번 가봤던 곳이지만, 이렇게 "봉하"라는 단어만으로도 아리는 곳이 될 줄은 몰랐는다. 봉하를 다시 찾은 건, 그가 가고 이틀 정도 지나서 였던 것 같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야밤에 간난쟁이 둘을 차에 싣고 네 식구가 봉하로 달려 갔었다.
유모차가 있다고 모두들 양보를 해 주어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국화꽃 한 송이 들고 그의 영정 사진 앞에서 흐느꼈다.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이제는 맘 편하게 봉하를 오갈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봉하는 아픔의 장소가 아니라 희망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후배의 남편이 거기서 일을 하고 있어서 들었는데, 그렇게 봉하=희망을 만드려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다시 봉하마을에 갔다.
이번에도 멤버는 동일. 우리 네식구다. 애들은 이제 유모차가 필요없을 나이가 되었다.
숲체험 프로그램
봉하마을은 집에서 30~40분 거리다. 예전에도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새로 고속도로 지선이 뚫려서 예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거리는 그대로 인데, 새로 들어선 건물도 있었고, 무엇보다 느낌이 좀 달랐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빛도 훨씬 밝아져있고, 봉하재단이나 노무현재단 쪽 사람들의 모습도 생기 만발했다. 주차장에서 사저쪽으로 난 길을 들어서면 어린이들에게 노란 바람개비를 만들어서 준다.
노란색만 봐도 눈물이 나던 시기에 태어나거나 젖먹이였던 애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노무현을 회상하는 어른들이 들르는 공간만이 아니라 아이들을 데리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봉하마을 뒷산, 그러니까 부엉이바위가 있는 산을 거닐면서 숲해설사님의 설명을 듣고 체험도 하는 자연체험 프로그램이다. 마눌님이 어떻게 알고 신청을 했는데, 인기가 많아서 겨우 가능했단다.
사저와 추모의 장 사이로 난 흙길로 들어서서 조금만 가면 산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보인다. 그 앞에서 여러가지 설명부터 들었고, 꼬맹이들은 찔레꽃 잎으로 페이스 페인팅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라고 그냥 따라만 다닐 수는 없었다. 갑자기 2인 1조를 짜더니 '다른 종류의 나뭇잎 5가지 따오기'같은 미션을 시켰다.
호젓한 산길을 따라 가면서, 흔하게 보이는 나무나 풀들을 좀더 애정을 가지고 만날 수 있게 안내 해준다.
높은 산이 아니라서 금새 올랐다. 정상쪽에는 조그마한 터가 있고, 거기서 아이들은 잠시 또 다른 미션을 수행해야했다. 그때 만든 무당벌레 브로치는 아직 집에 가지고 있다.
봉하마을 들이 한 눈에 바라보이는 사자바위도 부엉이바위처럼 낭떠러지다.
저 아래 들에 "사람사는세상"이라는 글귀와 노무현대통령이 밀집모자를 쓴 문양이 보인다.
아기자기한 프로그램들은 요맘때 아이들을 데려가면 부담없이 흐믓하게 해보기에 딱 좋다.
메뚜기 잡기
숲체험은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다시 들로 갔다. 조금은 정적인 숲체험과 익사이팅한 메뚜기잡기를 버무린 프로그램 구성이 돋보였다.
산만하고 금새 흥미를 잃을 수 있는 아이들의 맘을 정확하게 보고 설정한 기획^^.
거기다가 부모들에게는 봉하재단의 쌀 등이 철저하게 친환경농법으로 진행됨을 홍보할 수도 있고, 마을 조합원들에게는 부가수입이나 자부심까지 줄 수 있는... 뛰어난 기획력이랄까~
벌레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엄마도 도와줘서 둘은 신났다.
대어를 낚은 강태공 코스프레도 좀 해주고.
가을이라 싱숭생숭한 엄마도 몰래 좀 담고^^
그렇게 황금들녁에서 잡은 메뚜기들을 한 데 모았다.
그리고...
튀겼다. 그 자리에서 바로 튀기진 않았지만, 지난 주에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잡아서 튀긴 메뚜기를 꺼내 주었다. 우리가 잡은 건 또 담 주에 참여할 사람들을 위해 튀길 거란다.
징그럽다고 못 먹을 줄 알았더니, 애들이 잘 먹는다. 마른 새우랑 맛이 비슷하다면서
취학 전 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한다고 한동안 시골에 맡겨진 적이 있었다.
시골 마을에는 매점도 없었는데, 하루 한 대 정도 지나는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는 매점은 아니지만, 삼양라면, 새우깡, 브라보콘만 파는 그냥 살림집이 있었다. 엄마와 시골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큰엄마가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 귀한 브라보콘을 사준다고 데리고 나갔다.
막 그놈을 한 입 배어 무는데 맞은편에서 막 출발하려던 버스에서 엄마가 보였다. 나와 눈이 잠시 마주친 것도 같은데 이내 버스는 출발하고...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어쩌면 엄마가 나를 못 봤나? 나도 탄 줄 알고 있는 건가? 백미러로 운전기사 아저씨가 내 달리는 모습을 보면 세우지 않을까?
6살 짜리가 별의별 생각을 하며 달리는 동안, 브라보콘은 이미 흙바닥에 엎어진 지 오래고, 고개를 돌 쯤 흙먼지를 뒤집어 쓴 땀투성이 꼬마와 버스는 너무 멀어져 버렸다.
그곳에서 얼마나 지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생각으로는 몇 달은 되는 것 같았다. 당신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만 내 나름대로도 버림받은 느낌이 들어, 한동안 우울하게 보냈던 기억이다.
그때 머리에 이도 생겨보고, 나무망치로 물고기도 잡아보고, 토끼 새끼 낳는 모습을 지켜보다 내 인기척에 어미가 지 새끼를 물어 죽이는 모습도 봐야했고, 그리고 메뚜기는 정말 실컷 잡아먹었다.
골목대장이 모두에게 메뚜기를 잡아오라 했다. 한 명당 몇 마리라고 지정까지 해 주고는 그리고 자기는 지천으로 피고 있던 무궁화(당시는 박정희 정권 말기였다. 새마을운동의 영향인지, 마을 길엔 무궁화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를 잔뜩 땄다. 그리고는 집에 소여물을 쑤고 있는 아궁이에서 불씨를 가져와선 개울가에서 불을 피웠다.
좀 있다가 애들이 모여들면 대장이 따 놓은 무궁화 꽃당 한 마리 씩 메뚜기를 넣고 꽃잎을 말더니 불속으로 던져 넣었다. 직화면 그냥 다 타버릴텐데, 이렇게 하면 무궁화향도 살짝 베고, 타지 않고 속까지 잘 익는다고 했다.
'도시놈'이라고 온 마을 아이들의 놀림(실은 시기, 질투였던 것 같다)감이었던 나는 정말 못 먹을 것 같았던 그 놈을 호기롭게 한 입에 삼켰다가 나중에 다 토했던 기억이 있다.
이놈의 추억의 책장을 디비다가 너무 새 버렸군. 흠흠..
애들은 혹 내 나이가 되어 오늘을 회상할 때, '그때 그 봉하마을이 어떤 곳인지 그땐 몰랐지'라고 시작하진 않을까?
동판화
그렇게 오늘의 프로그램을 마치니 벌써 햇살의 색감이 바뀌는 시간이 되었다. 나오는 길에 사저 맞은편 부스에서 아이들이 동판화를 뜰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밥그릇 뚜껑으로 열심히 문지르면
이런 그림이 완성된다.
둘째왈, 나 이 할아버지 알아 그런다. 대통령 할아버지.
엄마한테 짐 맡기듯 줘버리고 다시 장난꾸러기로 돌아갔지만, 저 그림은 우리 차 뒷 창에 한동안 붙어 있었다.
부채감이야 평생 안고 살아가겠지만, 이제 좀 더 편하게 이곳을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이라 신청했지만, 정작 나에게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집사람한테 말했다. 내년에도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