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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Aug 21. 2018

좋은 삶

최근 은사님께 책을 선물받았다. 읽던 책을 마무리짓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철학 전공자가 쓴 책이다. 그리스 신화부터 초기 그리스도교까지 서구 고대 철학사에서 말하는 좋은 삶의 정의와 삶의 기술(Techne)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철학과 관련된 책이기 때문에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미새가 소화시켜 뱉어내어 아기새를 먹이듯이, 고대 철학 전공인 작가가 소화시켜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고 있기 떄문에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요즘 굉장히 많이 읽히고 있는 자기계발서 같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제목부터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저자의 전작과 성향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생각한 것은 이 책은 자기계발서이기도 하고 자기계발서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현재 말하고 있는 자기계발서라는 종류 자체가 이상한 분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이미 철학에서는 4천년부터 이상적인 삶 또는 그렇게 살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올바른 삶'에 대해서 말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에 대해서 논의했다. 그렇다면 철학과 현대의 자기계발서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대중들의 니즈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생각을 했다. 일반 대중들이 해답을 '찾길 바라는 지' 아니면 '주어지길 바라는 지'에서 둘 사이의 구분이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한 삶을 말하기 위해서 행복의 정의가 무엇인지부터 탐구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한 삶이란 행복과 삶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좋은 삶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좋다'와 '삶'을 분리해서 '좋다'는 것을 먼저 검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그것들은 바로 '완전성(teleia)'와 '자족성(autarkeia)이다.'
 - p.71. 2부 삶의 기술과 영혼의 훈련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완전성과 자족성이 최대로 발휘되는 삶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자기계발서는 어떤가? 현대의 자기계발서에서는 '좋은 삶' 자체에 대해서 말한다. '좋다'는 개념에 대한 고려 없이 좋은 삶이란 이러한 삶이다라고 정의를 내려버리는 것이다. 많은 경우 저자의 삶이나 유명인의 삶이 좋은 삶의 표준적 모델이 된다. 그들이 진정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혹은 스스로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누가 장담할수 있는가? 어쩌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리스의 말처럼 좋은 것이 아니라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완전성과 자족성이 지금 시대에도 좋은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우리 사회의 삶이란 어떠한가? 저자가 말하고 있는 철학의 기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이란 영혼을 돌보는 기술이다. 그것은 신체를 돌보는 기술인 체육이나 의술과 비슷하다. 한편으로 신체가 병이 들어 아프면 의술에 의해 치료하듯이, 영혼이 병이 들어 아프면 철학에 의해 치유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 신체의 훈련을 하듯이, 영혼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영혼을 훈련해야 한다는 점에 유사하다. 우리는 단지 이론을 연구하는 능력만을 훈련할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실천할 수 있는 능력도 길러야 한다. 
- p. 97. 2부 삶의 기술과 영혼의 훈련 중


찰학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치유가 과연 필요한가? 우습게도 이미 우리는 치유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간절히 바라고 있기까지 하다. 몇년전부터 힐링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그 신조어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서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힐링이 필요해'라고. Healing은 말그대로 치유다. 우리는 치유가 필요하다고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되뇌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이 발화되는 상황은 몸의 치유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인문학을 배우겠다고 독서모임을 하거나 특강을 다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영혼의 치유를 찾아다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가? 인식과 행동을 치유해야 한다. 인식과 행동의 치유와 관련된 기술들에 대해서 이 두 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설명하는 기술들(기술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일일이 설명을 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을 실생활에서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이불킥할 일이나 술먹고 전 애인한테 전화하는 일은 없을 것은 분명하다. 이론상으로 어떠한 고난을 겪더라도 견딜 수 있고, 실수를 할 일도 없다.

하지만 철학에 의한 치유라는 것은 욕망에 관한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쾌락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 즉 '아포니아(aponia)'를 말한다."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을 제거하는 것은 쾌락의 크기의 한계이다. 쾌락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있는 한, 신체의 고통도 영혼의 고통도 없으며, 두가지 모두의 고통도 없다." 우리가 쾌락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 것은 "쾌락이 존재하지 않아서 우리가 고통을 느낄 때" 뿐이며, "우리가 고통을 느끼지 않을때 우리는 더 이상 쾌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p.113 3부 인식의 훈련과 치유 중


위의 예처럼 서양 고대철학에서 말하는 쾌락과 우리가 알고 있는 쾌락과는 차이가 있다. 쾌락과 고통이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과연 그러한가? 물론 많은 철학자들이 물질적 욕망에 대해서 긍정한다. 다만 욕망을 탁월하게 발휘한 상태를 절제라고 하여 무분별한 욕망의 발현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다. 

나는 욕망이라는 것이 인간이 가진 불완전성과 불자족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완전하고 자족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면 그 어떤 것도 욕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대상은 잉여에 불과할테니까. 안타깝게도 인간은 자족과도 거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한다. 인간의 발전은 그 욕망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쾌락은 고통이 없는 상태일까? 그것도 의문이 든다. 인간은 영웅을 꿈꾼다. 영웅은 고난을 전제로 한다. 영웅은 오히려 고난과 모험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고난과 고통은 마치 당연한듯이 우리에게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변화를 가져온다. 


이 책에서 말하는 위에서부터의 조망하는 시선 등의 기술들은 분명히 우리를 치유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치유가 필요하다. 인간이기 위해서 치유가 필요하다. 뉴스를 보면 고통받은 영혼들이 주변에 고통을 뿌리고 다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고통과 욕망으로부터 영혼을 치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인류 전체로 보면 치유가 필요한만큼 욕망과 고통 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삶을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치유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현대는 어떠한가? 물질이 넘치고 쾌락이 넘친다. 인간의 삶은 여전히 고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모르핀처럼 쾌락으로 그 고통을 마비시켜버린다. 이 시대에는 치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고통에 바로 대면하는 것 역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 시대의 좋은 삶을 정의내리기 위해서는 완전성과 자족성뿐 아니라 욕망과 고통의 긍정적 측면까지 아우를 수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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