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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닮은 Dec 14. 2021

퍽 자주 피곤합니다.

10대 때부터 피곤을 유달리 잘 느끼는 몸이었다. 20대에도 난 남들보다 피곤하다는 소리를 입에 자주 달고 다녔고, 실제로 자주 피곤을 느꼈다.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너희를 낳고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피곤이 뭔지 모르고 살았는데 뭐가 그리 피곤하냐며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런데 난 정말 자주 피곤하다. 특별히 하는 게 많아서라기 보다는 늘 긴장하고 신경을 쓰고 지내는 성격 탓인 듯하다. 어느 강연을 보니 여자는 늘 생각을 하며 지내는 뇌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남자보다 더 복잡하여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잠도 못 자고 계속 그 일을 되새기게 된다고 한다. 꼭 여자와 남자의 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여자인 동시에 그냥 인간으로서도 다른 이보다 예민하고 신경을 많이 쓰는 성격이라 과도하게 에너지를 쓰는 편인 것 같다.


30대라는 낯선 나잇대에 진입하고 보니 이렇게 10년 단위가 빠르게 다가오게 된다면 지금처럼 지내서는 제 명에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편안하게 마음을 놓기도 하고, 긴장을 풀고 지내는 법을 터득해야 적당히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요 근래에 내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인생의 주제가 '나를 돌보는 법'이다. 늘 생각을 많이 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생각의 큰 주제가 2-3개월 단위로 바뀌곤 하는데, 올 한 해 내내 '나'라는 대주제를 벗어나지 못했고, 12월이 되어서는 '나를 돌봄'에 대한 화두가 계속해서 던져졌다. 그러고 보면 모델이란 외적으로 자기를 잘 관리된 상태로 보여주는 직업인데, 내겐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외모만 가꾸는 일이 불가능했다.


모델이 된 이유는 분명했지만, 되고 보니 더 이상의 나를 설득시킬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저 남들처럼 잘 되기 위해서 해야 한다, 혹은 뒤쳐지고 싶지 않으니까 달려야 할 것 같은 인상뿐이었다. 그런 동기는 남과 나를 비교하다가 좌절시키는 데에 효과가 있었을 뿐, 의미 있는 동기부여가 되지 못했다. 나는 원체 경쟁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로, 최애 플레이스가 시골 또는 그 근처의 시장일 정도로 소박한 감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경쟁의 한 복판에 있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고, 쉬고 있을 때조차 훌쩍 여행을 떠나 쉼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푸른 자연환경을 봐야 심리와 마음에 안정이 되어 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하던데, 나는 일을 시작한 이래로 내내 자연으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귀농이라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심한 적이 있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뭐든 너무 거창한 걸 생각해서 힘든 건 아닌가 싶다. 아주 대단한 성공, 아주 큰 사랑, 아주 큰 사건들을 일으켜야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에도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큰 사건들 속에서 내가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냥 머릿속 시스템에서 항상 큰 것들을 향해 가려는 욕망이 자리 잡혀 있는 것 같다. 원대한 포부는 좋지만, 내게 그런 것들은 의미는 없으면서 거대하기만 해 영양가 없는 작동 시스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유익 없이 거대하기만 해 짓눌려 있는 그런 그림이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내가 하는 작은 일들이 의미 없어 보일 때가 너무나 많다. 나는 저기 저 높은 곳을 향해 가야 하는데 정작 내 손에 쥐어진 일은,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에 비하면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니까 난 자주 짓눌리고, 불안에 떨며 현재를 만족하며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연스레 짜증은 늘어가고, 현실에는 불만만 가득하고, 모든 것을 고깝게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 과하게 상대를 배려하는 인위적인 관계 스킬을 구사하게 된 것도 참담한 일이다. 그러니 사람을 만나는 일에 많은 에너지가 쏠리게 되어 만남 자체를 꺼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냥 모든 일에 긴장을 풀지 못하고 힘주어 살아가는 것이다. 심지어 집에 혼자 있을 때 조차도 나는 몸에 힘을 빼지 못했다. 일어나서 밥을 먹는 것, 세수를 하는 일, 잠을 자는 일까지 모두 내게 버겁고 편치 못한 행동이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그게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찾기까지도 시간이 좀 필요했다. 나는 나의 생각이나 행동을 고치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필요했지만, 이런 긴장감과 불편한 감정 그리고 생각들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했다. 뭐든 크고 대단한 것들을 해내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 될 거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 그로 인해 짓눌린 마음과 신경, 그에 더하여 왜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결여된 목적. 나라는 사람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생각의 방향이었다. 잘못된 성공 개념으로 인해 내 몸과 마음, 정신은 피폐해져 있었고, 그로 인해 정작 마음을 쏟아야 할 나의 일과 생활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Just Relax"

내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너는 사소한 것들로 행복을 느끼는 시골소녀 같은 사람이니 너무 큰 - 네게 맞지 않는 원대한 포부를 품는 것이 너를 짓누른다면, 작고 아기자기한, 네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들로 하루를 그려나가도 괜찮다고. 그것이 뒤쳐지는 일이 아닐 거라고. 네가 그런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마음이 가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네가 아니면 그 사소하고 관심을 갖는 그 일들을 해줄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내게 이야기해준다. 그렇게 우리 모두 조금 더 힘을 풀고 생긴대로 살아도 괜찮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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