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평 남짓 작은 원룸 구석에 놓인 매트리스에 누워 공허함에 짓눌려 침잠되어 가던 나는 작년 여름의 초입에 오랜만에 사람을 만났다. 매트리스 밖으로 나갈 힘조차 내지 못하던 내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씻고, 외출복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 힘을 낼 수 있던 건 순전히 A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난 10년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다 보니 한국에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아도 쓸쓸히 몇 손가락이 남을 정도밖에 없었다. 그중 나를 매트리스에서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더욱 적었다. A는 그 힘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나는 A를 지난 직장에서 만났다. 각자 계약직으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고 냉혹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직장에서 나는 최대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일만 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사람 사이에 어떠한 감정이 움트는 대화와 상황은 가능한 피했다. 업무라는 주제 외의 사적인 이야기를 여는 순간 빗장이 열리듯 '나'의 생각과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직장이라는 환경 안에서 생각과 감정은, 특히 일개 '직원 1'일뿐인 내가 쏟아낸 생각과 감정은 어떤 때에 어떤 형태로 다시 내게 돌아올지 몰랐다. 사회 경험을 오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일'을 목적으로 부딪히는 경험이 하나 둘 쌓이다 보니 '나의 생각'은 '일'을 하는데에 있어서 불필요한 과속 방지턱이 되거나, 나를 향하는 화살이 되거나, 또는 주유소 앞에서 바람에 흔들려 기괴한 춤을 추는 거대한 풍선처럼 부풀려져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나를 우스꽝스럽게 속절없이 흔들어 대는 바람이 되곤 했다. 이런 '직장 생활'을 유연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만한 연륜과 처세술은 없던 나는 극단적으로 '나'를 '업무'라는 그늘 속에 가두고 감정이라는 그림자가 내 발끝에 들러붙지 않기 만을 바랐다. 누군가의 감정이 내 그늘 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경계했다. 그것이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구한 직장에서 계약직으로 살아남기 위한 극단적이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전략이었다.
그러던 중 A가 입사했다. 3개월 인턴 기간 후 계약직으로 이어지는 회사에서 A는 나보다 조금 어린 인턴이었다. 출근 첫날부터 고요한 사무실에 들어와 큰 백팩을 메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A를 보고서 저 웃음이 가능한 오래가기만을 바랐다. 첫 만남 당시 잠시 가졌던 그 작은 바람 외에 A에게 어느 감정도 주지 않았다. A를 그냥 '동료 1'로서만 대했다. 나와 부서가 달랐던 A와 교류하는 상황은 한정적이었고, 종종 협업할 기회가 있었지만 입사 후 극단적으로 선택했던 나의 전략이 꽤 잘 먹혀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A를 예외로 둘 필요도 없었다. A란 이름의 '동료 1'과도 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A는 나와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최대한 '업무' 속에서 '나'를 철저히 감추고 살아남는 방법만을 모색했던 나와 달리 A는 입사 첫날부터 퇴사 날까지 늘 A 본연의 모습 그대로 모든 사람들을 대했다. 스스로의 모습을 회사에서 드러내길 겁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스스로의 미래를 방해할지도 모르는 방지턱이나, 화살, 그리고 난데없이 부는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우스꽝스러운 풍선 인형이 될지라도 A는 늘 당당했다. 계약직이라는 불안정한 고용환경 속에서 재계약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어 임원들의 말 한마디에도 신경 쓰고 말을 아끼게 되었던 분위기에서 A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A는 알맹이가 부족한 허황된 말들만 오가는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생각했더라도 차마 던질 수 없던 질문을, A는 차분하게 손을 들고 또박또박 객관적인 증거와 치밀한 논리로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논의되어야 할 핵심을 찌를 줄 알았다. 무엇보다 더 눈에 띄었던 것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지점까지 지적할 수 있던 A만의 관점이었다. A는 그동안 스스로 차곡차곡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지어 올린 자신만의 관점으로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볼 줄 알았다. 그 시선은 예리했고, A가 내놓는 주장은 팩트와 논리로 꽉 차 있었다. 언제 불어 올지 모르는 태풍에 휘말려 들지 않으려고 모두가 몸을 사려 그 좁은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잔뜩 몰려 몸을 굽히고 있는 동안 A는 기꺼이 태풍에 다가가는 사람이었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A는 존재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A가 해외파서였을까? 아니면 A가 한국 회사에서 사회경험이 부족해서였을까? A가 상대적으로 어린 직원이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A를 생각할수록 이 질문들은 A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피상적인 질문이었다. 내게 A는 나이가 어림에도, 속을 가득 채운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자신이 알아야 할 지식을 쌓고 그 위에 자신의 관점을 얹어 내면을 풍부하게 채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혼자 업무 데스크에 앉아 A의 뒷모습을 보며 추측하곤 했다. 사회 초년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을 단단히 채워왔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정면으로 마주하고 부딪힐 줄 아는 용기가 있는 정말 특별한 사람. '나'의 생각과 마음이 어떤 형태로 내게 돌아올지 몰라 지레 겁먹고 '업무'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업무 기계'처럼 생활하던 나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빛나는 사람이었다. 질투조차 할 수 없었다. A의 올곧음과 단단함은 내가 흉내 내려해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A가 살아온 매일의 치열함과 진심이 만들어 낸 단단함이었기에, 나는 그저 A를 동경했다. 나는 '동료 1'에 불과했던 A가 점점 궁금해졌다. A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A의 단단함을 배우고 싶었다. A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알고 싶었다.
나는 A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A를 사적인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항상 일정정도의 거리를 두고 업무 이야기만 주로 하던 내가 한 연락이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A는 첫날 자기 몸만 한 백팩을 메고 환하게 웃으며 사무실에 들어왔던 것처럼 어떠한 경계나 허물없이 기꺼이 내 연락을 받아주었다. A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귀국 후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A의 퇴사 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는 A에게 대뜸 'A 씨는 꼭 박사과정 하셔야 해요. A 씨 같은 분이 박사를 해야 하는 거예요'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그 모습이 마치 길거리에서 '도를 아세요?'라고 묻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정말 진심이었다. 사실 A가 퇴사하기 전, 나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복도를 지나가던 A를 붙잡고 '나의 생각'을 동료에게 회사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적이 있다.
"A 씨 이번 회의 때 하신 질문이랑 코멘트 진짜 좋았어요. 어떻게 항상 그런 정확하고 예리한 질문을 하세요? 혹시 박사 해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회사에서 처음 내뱉은 내 생각이 '박사 진학 추천'이었다. 그것도 '동료 1' 정도의 거리만 유지하고 있던 사람에게. 그만큼 나는 진심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A 같은 사람이 박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도 석사 진학을 결정하며 언젠가 공부하고 싶은 주제가 생기면 박사도 도전해 봐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지만, 석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 생각을 바로 지웠다. 석사는 남들보다 조금 더 강한 지적호기심과 어느 정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학위지만, 박사는 레벨이 아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박사 학위는 정답보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딸 수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필요한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전에, 세상에 필요한, 꼭 던져지고 해답을 찾기 위해 모두가 달려들 가치가 있는 질문이 필요하다. 박사 과정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그에 맞는 답을 찾아가는 지난하고도 고난한 시간이었다. 가치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단순히 호기심이 강하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흔들림 없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문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예리한 눈을 가진 사람만이 세상에 던져져야 할 가치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래서 A였다.
처음 회사 복도에서 박사 진학을 권했을 때는 쑥스럽게 웃으며 '하고는 싶은데 자신이 없다'며 망설이던 A가, 나의 퇴사 직후 만난 자리에서는 박사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퇴사 직후 한창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만 가득 부풀어있던 나는 A의 결정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우리 둘 다 잘해보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퇴사 직후 머릿속에만 가득했던 '하고 싶은 일'에 대해 A에게 떠들었다. 이 일은 이렇고, 저 일은 이렇고, 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그런 게 내가 하고 싶은 일 같다고.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들어주던 A도 내가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의 무모한 퇴사를 지지해 주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새로 이사 온 원룸의 침대를 나만의 섬 삼아 고립되어 가던 나는 A와 연락이 닿았다. 박사를 준비하기 시작한 A와 취업 준비생이 된 나는 지난 1년 동안 연말연시 안부만 전했을 뿐 만나지는 못했었다.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며 화기애애하게 꿈을 늘어놓던 그날로부터 약 1년이 지나있었다.
1년 만에 만난 A는 회사에서 첫날 만났던 때처럼 여전히 자신의 몸만 한 큰 백팩을 메고서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오랜만에 침대 섬에서 빠져나와 바깥공기를 마신 나는 A가 자연스럽게 발하는 빛에 내 몸에 쌓였던 원룸의 먼지 냄새를 털어내었다.
"저 박사 유학 가게 되었어요."
박사 진학을 준비하겠다고 말한 지 약 1년 후, A는 그 말을 실현시켰다. 원하던 학교에 펀딩까지 받고 박사 진학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진심으로 A 같은 인재가 박사 진학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나였기에 내 일처럼 기뻤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1년 동안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박사 진학을 준비했다던 A의 지난 1년이 얼마나 빈 틈 없이 치열했을지, 1년 전보다 더 얄팍해진 A의 몸이 그간의 고단함을 보여주었다. 역시 A 다웠다. 쉽게 덤빌 수 없는 도전을 감행하고 원하던 결과를 움켜쥔 A의 야윈 어깨가 어쩐지 더 단단해 보였다. 서로 힘내보자고 격려하며 꿈을 나누던 1년 전의 약속을 나는 지키지 못했다. 함께 열심히 해보자 했는데 나는 퇴사 직후 A에게 떠들던 '하고 싶은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직 시 알아두어야 할 것들'에 정리된 불릿포인트에 갇혀 방황하다 결국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의미없이 빙빙 돌며 1년을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말았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 낸 시간표 따위는 무시하고 내 속도로 가겠다고 작은 몸을 억지로 크게 피며 당당하게 말하던 나는 지난 1년 동안 계산만 하고 있었다. '이직 시에는 연봉이 떨어지는 곳보다 연봉을 지키거나 적어도 오를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조언에 집착하게 된 나는 '하고 싶은 일'은 까맣게 잊고서 연봉과, 일의 강도, 회사의 성장 가능성 등 부수적인 것들에 집중했다. 핵심을 놓쳐버리고 만 나는 그렇게 매일을 가차 없이 흘려보냈다. '박사 진학'이라는 핵심에 중심을 두고 1년 동안 흔들림 없이 부지런히 움직여 온 A와는 당연히 다른 결과였다. 역시 질투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도 당연했다. 외려 1년 전 A와 함께 웃으며 나누었던 목표를 나도 달성했다면 그게 불공평한 것이었다.
"저 8월에 떠나요."
A의 소식에 대한 기쁨과, 나의 지난 1년에 대한 자책감 휩싸여 머리가 터질 것 같이 복잡해지던 중 A가 말했다. 박사 진학을 위해 오는 8월에 한국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박사 진학을 추천한 건 나였지만 A가 한국을 떠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저 바보가 아닐 수 없었다. A가 떠난다는 말을, 그것도 얼마 후 떠난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머릿속에서 끝없이 엉켜가던 자책감의 자리에 공허함이 몰려왔다. 귀국 후 처음 사귀게 된,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고 함께 꿈을 얘기할 수 있는 소중한 친구 한 명이 떠나게 되었다. 또, 말이다.
내가 유럽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던 반복적인 만남과 이별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들에게 받은 영감과 자극으로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얻어왔던 나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외국인으로서 비자를 찾아 부유해야 했기에 소중한 만남만큼, 끝없이 이별을 겪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는 것이 삶의 순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받아들이고 덤덤해지려 노력했지만, 만남과 이별이 반복될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몸과 마음이 점점 닳고 해졌다. 겨우 이성으로 얼기설기 기워놓은 마음이 무너진 것은 내가 3년 동안 살았던 프랑스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이사를 하면서였다. 오스트리아에서의 일정은 유한했다. 1년짜리 비자. 물론 1년 동안 기울인 나의 노력에 따라 다른 기회가 올 수도 있을 법했고, 운이 좋게도 실제로 오스트리아 체제 기간이 끝날 무렵 다른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나는 그 기회를 버리고 귀국을 선택했다. 오스트리아에 입국하면서 만난 사람들 모두 다 1년 후에는 헤어질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마음조차 주지 않고 감정이 생기거나 스며들 순간들 조차 모두 피해왔던 나는, 프랑스를 떠나며 무너져 내린 닳고 낡아 빠진 마음을 추스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귀국을 선택했다. 적어도 비자 걱정이 없는 한국에서 정착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이별을 또 겪는 일은 없겠지라는 생각이자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착각이었다. 나는 또 틀렸다.
그동안 다양한 곳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을 각자의 나라로, 혹은 그들이 좇는 꿈을 향해 떠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늘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상 우리는 영원히 친구라고. 내가 너의 친구라는 걸 잊지 말아 달라고. 나는 진지하게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고 안아주며 이별을 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지금도 믿는다. 그래서 그들이 꿈을 좇아 새로운 곳으로 향해 나아갈 때 그 등을 보며 "우리 또 보자"라는 말로 내 진심 어린 응원과 간절한 바람을 전할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나이가 몇이든, 어떤 꿈이든, 자신만의 이상향을 좇는 그들의 삶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삶의 모습과 같으니까. 함께 웃으며 꿈을 나누던 이들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나도 내 꿈에 닿아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보같이 내가 A의 등을 밀어놓고서 막상 예상치 못했던 이별이 닥치자, 한국에서 이별을 겪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내게 공허함이 밀려왔지만, 늘 그래왔듯 나는 A의 큰 백팩을 멘 야윈 등을 보며 "우리 또 봐요"라는 말로 내 진심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A의 여정의 어딘가에서 또 한 번 웃으며 조우할 수 있도록 나도 고립된 매트리스 섬에서 나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점차 멀어지는 A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A는 작년 8월 한국을 떠났다. 속이 꽉 찬 야무진 사람이지만 홀로 낯선 땅에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긴장되는 일인지, 프랑스를 떠나기 전 인천 공항 출국장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까지 망설이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A는 조금 덜 두려워하기를, 조금 덜 긴장하기를, 조금 더 많이 웃기를 바랐다. 빈 여름 하늘에 아무렇게나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고 내 발끝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난 서울, 홀로 남겨져 1년 동안 조금도 앞으로 내딛지 못했던 내 발이 디딘 자리를 둘러보았다. 머릿속으로만 치열했을 뿐,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던 내 자리에는 발자국도 남지 않는 굵은 모래알만이 굴러 다닐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