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이름의 공사 현장: 슬픔을 다지고 수용을 세우다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다 보면,
때로는 아이보다 먼저 무너져 내리는 부모님의 마음을 목격하곤 합니다.
학교에서 걸려 온 청천벽력 같은 전화 한 통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어느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저 또한 교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함께 그 비참함의 바닥을 쳤습니다.
이 글은 아이의 돌발 행동 뒤에 숨은 부모님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쓴 기록입니다.
부모님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내 아이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속도로 걷고 있다는 것,
그래서 언젠가는 세상이라는 거친 파도에 부딪히게 될 거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막상 학교라는 현장에서 마주하는 진실은 그 각오보다 훨씬 시리고 날카롭습니다.
어떤 아이는 친구들에게 음식을 사주고도 고맙다는 말 대신 계산대 앞에 홀로 남겨집니다.
거절하지 못하는 그 순수한 무지함이 누군가의 장난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부모의 마음은 비참함의 바닥을 칩니다.
또 어떤 날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의자를 던진 아이를 대신해,
피해 학생 부모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내 아이가 피해자였다가 한순간에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이 혼돈 속에서 부모님들은 절규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 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그 무너진 잔해 속에서 저는 부모님들과 함께 깨달았습니다.
마음 근육은 평온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처참하게 무너진 바닥을 치고 올라올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것을요.
아이를 바꾸려 애쓰고 남들처럼 평범해지기를 강요했던 ‘가짜 설계도’가 무너진 그 자리에,
우리는 새로운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수용’이라는 기둥입니다.
수용은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의 결핍과 아픔을 있는 그대로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형태입니다.
"너는 왜 남들 같지 않니?"라는 원망을 거두고,
"세상이 너에게는 참 버겁고 무서운 곳이겠구나"라고 아이의 투박한 몸짓 뒤에 숨은
외로운 비명을 먼저 들어주는 것입니다.
비바람이 불 때 집을 지탱하는 것은 화려한 외벽이 아니라 단단한 기둥입니다.
부모가 ‘수용’이라는 기둥을 단단히 세울 때,
아이는 비로소 그 울타리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고 닫혔던 마음의 빗장을 풉니다.
혹시 지금 아이의 일로 마음이 무너져 바닥을 치고 계신 분이 계신가요?
그 비참함과 절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단한 수용의 기둥을 세우기 위해 땅을 다지는 과정일 뿐입니다.
교실의 창가에서, 저는 오늘도 아이의 뒤에 서 있는 부모님의 단단해진 마음 근육을 응원합니다.
무너진 마음 위에 세운 그 기둥이,
결국 아이와 부모를 지켜줄 가장 강력한 집이 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