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선행'의 조바심을 내려놓고, 캐나다식 '느긋함'을 마주하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울 때 제 손목시계는 언제나 '다음'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다음 학기 문제집, 다음 레벨의 학원, 그리고 남들보다 한 발 앞서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기준선.
우리는 그것을 '선행'이라 불렀고, 그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면 부모로서 직무유기를 하는 것만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 저를 가장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아이의 교과서가 아니라 선생님들의 '느긋함'이었습니다.
한국식 교육에 익숙한 제 눈에 캐나다의 교실은 가끔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이가 수학 문제를 조금 헤매고 있어도 선생님은 답을 알려주는 대신 그저 지켜보셨죠.
참다못해 제가 "집에서 미리 좀 가르쳐 보낼까요?"
라고 물었을 때, 선생님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을 뿐이에요. 아이마다 각자의 계절이 있거든요."
그 '아직(Not yet)'이라는 단어가 제 마음속 조바심을 툭 건드린 순간이었습니다.
선행학습이 아이의 시간을 앞당겨 쓰는 일이라면,
이곳의 기다림은 아이가 스스로 뿌리 내릴 시간을 벌어다 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곳의 성적표에는 등수가 없습니다.
대신 아이가 어제보다 무엇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떤 호기심을 보였는지가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앞서가는 아이를 시기할 필요도, 뒤처지는 아이를 가엽게 여길 필요도 없는 교실.
처음에는 이 느슨한 시스템이 불안했습니다.
'이렇게 천천히 가도 괜찮을까?' 싶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습니다.
1등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가 사라진 자리에, 아이들 각자의 수만 가지 색깔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요.
한국식 선행이 '불안'을 동력으로 삼는다면,
캐나다식 기다림은 '신뢰'를 양분으로 삼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답을 찾아낼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조금 늦더라도 결국 자신만의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죠.
저는 여전히 가끔 불안해집니다.
한국의 익숙한 속도감이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계를 보는 대신 아이의 표정을 봅니다.
오늘 무엇을 배웠느냐보다 오늘 얼마나 즐거웠는지를 묻습니다.
선행학습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이가 스스로 피어날 때까지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기다림의 미학'라는 것을 이곳의 교실에서 매일 배워가고 있습니다.
"조바심을 내려놓은 자리에 아이의 웃음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교육이란 아이를 앞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속도로 걷는 길을 뒤에서 묵묵히 비춰주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