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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무암 Sep 08. 2023

뿌리를 잃은 너를 바라본다.

열매글방(9/7) : 식물

예전에 살던 아파트 앞에 꽃 트럭이 자주 왔다. 뿌리가 없는 식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늘 그냥 지나쳤지만, 그날은 튤립이 정말 예뻐서 몇 송이 데려왔다. 좁은 바구니 속에 한가득 꽂혀있는 동안 숨쉬기 힘들었을 것 같아, 얼른 포장을 풀고 잎을 정리한 후 적당한 화병에 물올림 했다. 며칠 후 튤립들이 햇살을 향해서 활짝 피었는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꽂아둔 튤립이 한 곳을 향해 피어나는 걸 보니 문득 미안해졌다.


단단히 딛고 일어나 바람을 만나고 벌과 이야기하며 다음 디딜 곳을 찾아가려 했을 튤립은 뿌리를 잃고 화병의 키에 맞게 잘린 후에도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의 공간에 놓였지만 굴하지 않는 그 모습은 우리 집 화분 속 식물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 죽어버린 줄 알았던 화분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걸 보았을 때의 놀라움이란.


그저 닿은 곳에서 자라고 피어나고 시들지만, 그 자리에서의 생에 최선을 다하는 존재. 가끔 꽃 선물을 할 때면 뿌리를 잃은 튤립을 위해 시드는 그날까지 부지런히 물을 갈아주던 때를 떠올린다.

여러번 다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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