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글방(10/10) : 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의 술을 좋아한다. 술을 잘 못하지만, 소주 한 병을 마셔도 즐거울 때가 있다. ‘첫 잔은 소맥으로 할게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술이 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무감으로 앉아있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면 쉽게 취하고, 몸이 아파져 온다. 체질이 변한 건 아니었던 거다.
어릴 때는 소주 한 잔에 홍익인간이 되고, 소주 두 잔이면 ‘쿵쿵 쿵쿵‘ 심장 소리가 사람들 말소리보다 크게 들리고 온몸의 맥박이 느껴졌다. 이내 오한이 들고 온몸이 쑤셔서 그 자리에 더 있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피하게 되었고, 자주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내가 술을 잘 마시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전날 함께 자리를 한 사람 중 2차를 간 사람들이 다음 날 버틸만한 숙취를 호소하며 어제를 추억하는 모습을 볼 때. “아 많이 마셨다. 다시는 술 안 마셔야지.” 라는 공허한 다짐과 “그래도 어제 그거 진짜 웃겼지?”와 같은 후토크. 그 잔상을 즐기는 모습. 숙취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 여운은 궁금했단 말이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서 그것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술이 늘었다. 그들에 비해 소박한 주량으로 나름의 소소한 숙취를 견디며 잔상을 즐긴다. 여운을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