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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뒤에 사람이 있다

이메일 보내며 생각해 볼 일

by 오와나


나는 이메일 계정을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만들었다.

정확히 기억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교과 과정 중 이메일 계정 만들기, 이메일 보내기 등을 실습하는 게 있었고, 담임선생님은 학년+반+번호의 숫자조합으로 아이디를 만들라고 주문했었다. 숫자 5가 포함된 그때 그 아이디를 나는 아직도 쓰고 있다.


이메일 계정을 만들고 신이 났던 초딩은 반 친구들과 매일 쓸데없이 메일을 주고받았다.

(아마도 그 메일들은 여전히 온라인 세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학생이 돼서는 과제를 제출하는 용도로, 내게 쓰는 편지함에 자료 보관용으로, 자소서를 들입다 날리는 용도로, 내 메일 계정은 쉼 없이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입사 후 '아웃룩'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쓰게 됐다. 계정은 생겼는데, 아웃룩을 배워본 적이 없으니 헤매기만 했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오만 가지의 말이 담긴 메일들이 나를 넣고 오고 가는데... 정신이 없었다.

메일정리는 일잘러의 기본사항이라고 하나, 누구도 나에게 메일을 어떻게 정리하는지 가르쳐주질 않았다.

내 이름을 발신자로 달고 보내는 메일에 참조자들이 늘면 늘수록 그 무게가 고스란히 내 마음속에 쌓이는 듯했다. 잘못 보낸 건 없을지 심장이 쿵쿵 뛰고, 내가 쓴 메일 때문에 누가 따지듯이 전화라도 오면 어쩌지,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메일을 보내는 것이 무겁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신입사원 때부터 지금까지 메일 하나하나에 꽤 정성을 들였고, 보내기 전 두세 번씩 기본적으로 살펴보곤 한다. 메일이 곧 나의 업무능력을 보여주는 척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메일이 오고 가는 것을 볼 때 기가 차는 경우도 정말 많다.


구어체 요정 : 뭐가 문제예요? 고쳐주세요! 등등 공식적으로 오고 가는 메일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카톡대화처럼 메일을 쓰는 사람들.


나는야 MZ : 요상한 줄임말을 메일에서 쓰는 사람들.


니가 누군지 내가 누군지 나도 몰라 : 나의 신분을 제대로 밝히지 않거나, 상대의 이름 또는 직급 등을

아무렇지 않게 오타내고 메일을 쓰는 사람들.


급발진 빌런 : 화가 났다!!!! 메일에도 분노를 표출하겠다!!!!


등등.

이런 메일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태도와 업무역량까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회사에서 업무메일을 보낼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사항들을 한 번 읽어보세요!




최근 이슬아 작가는 '이메일'을 주제로 '일간 이슬아' 구독을 재개했다. 구독해서 매일매일 소중하게 그녀의 글을 읽고 있는데, 처음 받았던 글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화면 뒤에 사람이 있다.


그렇다.

일을 하다 보면 대면해서 무언가 의견을 나누기보다는 메일로 업무내용이 오고 가고, 수정되고 보완되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러다 보면 내가 쓰는 메일을 형체가 있는 사람이 받는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간과할 때가 있다. 내가 급하니까 일단 당장 내놓으라는 식의 태도나, 니가 틀린 것을 굳이 지적하겠다는 태도, 이딴 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식의 태도 등을 메일에 넌지시 드러내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고 가는 일이라는 걸 종종 잊게 된다.


이슬아 작가는 메일로 멋들어진 글을 써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보내는 사람이다.

나는 메일로 가끔은 강경한 요구, 때로는 비굴한 부탁의 글을 써서 회사 일을 하는 사람이다.

뭐, 우리 둘 다 메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뭐 그리 크게 다를까라고 생각하는 밤이다.ㅎㅎ

이슬아 작가의 글처럼, 내일은 내가 보내는 메일의 수신자를 생각하며 메일을 써보려고 한다. 그 사람 역시 화면 뒤에서 치열하게 자기의 삶을 사는 사람임을, 나와 함께 한 배를 탄 승객임을 잊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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