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게 된 이유
요즘 퇴근 후 온라인으로 성우 수업을 듣고 있다.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은 하나같이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그냥 재밌어 보여서” 말고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나는 눈에 띄기 싫어하는 평범한 회사원이고, 맡고 있는 업무도 학창 시절 전공도 성우와의 연관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성우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진지한 마음가짐 역시 없다. 어쨌거나 순전히 효율성의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시간 낭비가 맞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낭비하는 시간 없이 24시간 내내 생산적일 수 있단 말인가.
수강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날은 재택근무 중이었고 나는 점심시간을 활용해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인스타그램을 하염없이 새로고침 하던 중 한 온라인 성우 수업 광고가 갑작스럽게 나의 관심을 끌었다. 수강권을 무려 70퍼센트나 할인하는 데다 할인 종료까지 단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새 해를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언가 새롭고 보람찬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던 나는 곧바로 결제를 위한 합리화 단계에 돌입했다. 그래 맞아, 나는 남들 앞에서 하는 발표는 자신 없어도 목소리는 나름 똑 부러지는 편이잖아. 어릴 때는 카세트테이프로 목소리 녹음하는 것도 좋아했고, 포켓몬 흉내도 잘 내고, 친한 친구들로부터 성우 해도 될 것 같다는 말도 몇 번 들어봤고... 어쩌면 이 강의로 숨겨진 재능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사실은 내가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인 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퇴사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을 돌아보며 쥐어짜 낸 ‘성우 연기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유들'과 타임 세일이 가져온 조급함이 합심한 결과, 수강권을 결제하기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다음 날에도 똑같은 할인이 진행되고 있는 걸 보고 기업의 상술에 치를 떨긴 했지만 돌이킬 순 없었다. 이제 와서 환불하기에는 그 수업을 반드시 들어야 하는 이유를 너무 많이 만들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합리화에 지나치게 큰 재능을 보인 나머지 이제는 수업을 듣지 않으면 오히려 아쉬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인생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아직 모르는 취미생활 목록' 맨 밑에 성우 수업이 추가되었다.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합리화를 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내 목소리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다. 특히 수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경우에 더욱 서먹해진다. 내 몸에서 나는 소리인데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머릿속으로 상상한 말은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게 아니라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것만 같다. 그걸 깨닫는 순간 얼굴이 빨개지면서 행동이 어색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목소리를 조절하며 심지어 감정까지 실어 연기해야 하는 '성우'라는 직업은 아마 나의 직업적성검사 결과지에서 영영 추방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단어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무의식 중에 성우 수업에 끌리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흑역사 생성에 기여한 나의 가장 큰 약점을 정면 돌파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