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이 꽤 나가는 옷을 선물로 받았다. 가방이나 겨울 외투 몇 벌 말고는 이만한 돈을 투자해 옷을 산 기억이 없어, 새 옷과는 아직 서먹한 사이로 지내는 중이다. 서먹하다는 것은 밥 한 숟가락 뜰 때조차 혹시나 옷에 음식이 묻을까 불안해하게 되는 상황을 일컫는다. 값나가는 옷을 입을 때마다 내가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옷이 나를 입는 느낌이다. 그건 아직 내가 그 정도로 비싼 옷을 감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도 선물 받은 옷은 나의 평소 스타일과 썩 잘 어울렸고 피부에 닿는 감촉이 아주 부드러웠다. 선물해 준 이가 신경 써서 골랐음이 느껴져 고마웠다. 기쁜 마음으로 옷을 입고(혹은 옷이 나를 입고) 외출도 하고 아무것도 묻히지 않은 채로 귀가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값비싼 옷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세탁을 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판가름 나는 듯하다. 나는 보통 빨래를 건조기에 돌려 말리는데, 이 옷은 감히 건조기에 넣지 못하고 양지바른 곳에 잘 펼쳐 널어놓아야 했다. 그러고 나서도 혹시나 옷에 옷걸이 자국이 남는 건 아닌지, 월세집 기본 옵션으로 딸려 있는 빈티지 통돌이 세탁기에 돌리는 바람에 옷감이 상한 것은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어떤 물건이든 좋은 상태로 오래 쓰기 위해서는 신경 써 관리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동시에 몹시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다 마른 옷을 개어 옷장에 넣으며 나는 문득 몹시 피곤하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는 그냥 건조기에 막 돌려도 되는 옷만 살까 싶었다. 조금 줄어들거나 옷감이 상해도, 짬뽕을 먹다가 국물이 잔뜩 튀어도 잠깐 속상해하고 잊어버릴 그 정도의 옷들.
얼마 전 만난 친구가 좋은 것들은 자꾸만 자기를 떠나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기운 없어하는 친구를 위로해주고 싶어서 떠나간 것들만 보지 말고 아직 네 곁에 남아 있는 좋은 것들을 보라고 대답했다. 좋은 것 열 개 중 다섯 개가 떠나갔어도 다섯 개는 남아 있지 않냐고, 힘을 내서 살다 보면 빈자리는 다시 좋은 것들로 채워질 거라고. 친구는 위로가 되었다며 고마워했지만 사실은 나 또한 그 말을 잘 실천하지 못하고 미련 가득한 하루를 보낼 때가 많다. 마치 싸구려 세탁기에 비싼 옷을 넣는 기분으로, 나의 경솔한 말이나 행동이 좋은 인연에 상처를 내지는 않을까 발을 동동 구른다. 좋은 것들을 떠나보내는 게 너무 무서워서 애초에 최고로 좋은 것 말고 적당히 좋은 것들만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건조기에 마구 돌려도 아무 상관없는 옷처럼, 애초에 기대치가 낮아서 나를 떠나가도 큰 상처를 남기지 않을 그런 인연들 말이다. 하지만 그건 푸념일 뿐이고 잃는 게 무서워서 아예 가지지 않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다. 나는 언제라도 좋은 것을 발견하면 곁에 붙잡아 두고 싶어 안달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냥 지금처럼 좋은 것들을 잔뜩 끌어안고 애지중지해 가며 살기로 마음을 고쳐 먹는다. '좋은 것'이 '좋았던 것'이 되더라도 크게 상처받지 않고 기억 한구석에 곱게 보관할 수 있도록 마음을 튼튼하게 단련하면 그만이다. 조금 피곤하면 어떤가, 좋은 것들이 나를 살게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