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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 Oct 29. 2023

카페인과 오미자

잠을 깨우는 것과 잠재우는 것

늦은 저녁, 집 앞 카페에 들러 오미자차를 시켰다. 오미자는 허한 기력을 보충하고, 긴장을 완화하며, 불면을 예방하는 효과를 가진다. 특히나 이곳에서 파는 오미자차는 마시자마자 머리가 무거워지고 눈꺼풀이 아래로 처지니 다른 카페와 다른 레시피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내일은 월요일이니, 오늘은 충분히 쉬고 잠을 자야지.


번주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저저번주에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누군가가 줄초상이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줄초상인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니, 둘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이어졌다. 간호사가 할머니에게 슬쩍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준 것이 아닐까, 그 충격으로 돌아가신 것은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증거는 없지만 말이 되어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점차 미신으로 향해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혼자 놔둘 수 없어 함께 가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근거는 없지만 아름다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나쁜 사람을 애도해도 되는지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있어 편안히 애도하기 어려웠으나, 할머니의 경우 안타까운 사정만이 남아 죽음에 대한 아쉬움만을 담아 울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따귀에 멀어버린 귀. 사랑을 달라며 보채던 자의식 강한 자식들, 또 뭐가 있을까. 집안의 귀한 달걀을 친구들과 종종 훔쳐 먹으면서, 그때마다 시집온 어리고 어리숙한 할머니에게 뒤집어씌웠다, 죄송하다, 죽은 자의 영정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할머니가 사람들의 모든 죄를 사해줄 것처럼 말이다. 죽은 자의 영정 앞에서 죄와 아쉬움과 설움과 원망에 대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달걀을 훔쳐먹고 뒤집어씌운 그 사람을 업어 키웠다고 할머니가 말했다. 업어 키웠다고 했으니, 그 사람의 달걀을 훔쳐먹은 죄까지 업고 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을 못 하다가 말을 할 상대가 생겼을 때의 모양은 어떨까. 어머니가 시집살이를 했던 이야기들, 할머니가 자꾸 거짓말을 하고 나를 모함했다, 하는 이야기들은 할머니의 눈에 남은 잔상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하다, 는 말 한마디로 잊혀버린 억울함에 대한 잔상이 대를 이어 내려왔을까.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마음이 더 무겁다고 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전보다 무언가 해소된 얼굴들이라 다른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겠다, 추측도 했다, 아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세대의 서사가 끝나고, 본인들의 새로운 서사를 쓸 기회가 생겼다며 안도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괴로움이 끊길까. 모르겠다. 그래서 인생에 한 번은 가족, 친척들과 멀리 떨어져 살아보려 한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기 위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 못하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오미자차를 마시며,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난잡한 글이 머릿속에서 빠져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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