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백

by 헤이

이번 달은 많은 사람과 만났다. 미뤄온 숙제를 해결하듯 성급했다. 근래 인생에 그림자조차 없던 제과와 제빵학원을 다니며 자격증을 땄더니, 간만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평생 글만 보고 살았는데 지금은 글만 피하며 다녔다. 불편한 맘이 들면 과자를 굽고 밭을 갈았다. 방에 가득 쌓았던 책을 한 켠에 정리하고 글도 속으로 삼켰다. 새로운 도전도 재미는 있지만 어딘가 헛헛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왜 글에 집착할까. 해오던 일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과거에 대한 잔상일까. 문학을 밀고 나가는 내내 제 주제에 맞지 않는 삶을 탐하는 듯 보였다. 뛰어난 창의력이나 진지한 고찰은 너무도 먼 일이었다. 쟁쟁한 경쟁자들 틈에서 나는 부족한 부분만 많았다. 어느 순간 쓰는 게 즐겁기보단 고통스러웠다. 할 말은 고갈됐는데 계속 백지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수님의 제안을 거절하고 무작정 뛰쳐나왔다.


나의 행보는 알다시피 브런치로 작성했다. 회사를 들어갔다가 그마저도 견디기 어려워 3년 만에 뛰쳐나왔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 용기는 없었는데, 눈 떠보니 시골이었다. 시골에선 좀 느긋할 줄 알았는데 사람이며 일에 치이다가 다시 브런치로 기어들어왔다. 잠시 글을 접은 동안 그나마 흥미가 생긴 제과와 제빵으로 들어섰다. 만드는 동안은 단지 '맛있게 잘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 밖에 없어서 편했다. 어쩌면 글을 쓸 때보다도 즐거웠다. 그럼에도 나는 백지로 돌아왔다.


이 막막한 대양으로 뛰어든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원피스라도 찾고 싶었나? 전공을 시작할 때 친구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큰 포부를 가진 이보다는 그저 '흥미가 있어서', '해보고 싶어서'라는 답변이 많았다. 나는 포부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은 모두가 그렇듯 뭔가 대단한 별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 수많은 꿈들과 다르지 않았다. 사회에 대해 일찍 깨달아서 빨리 적응하는 친구들이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다. 내게는 다른 길과 꿈이 있어서였다. 지금은 내가 정말 몰랐다는 자책이 종종 덮쳐온다.


아무리 방비해도 무너지는 부분이 있다. 내가 격랑을 넘으며 얻은 첫 깨달음이다. 학생 때는 좋은 대학을 들어가고 싶었고, 대학 때는 좋은 글을 써서 성공하고 싶었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해보고, 시간을 쪼개서 글을 써봤다. 해봤는데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운이 안 맞을 때도 있고, 뭐 이런 저런 이유로 여기로 돌아왔다. 그 동안 나는 성공을 원한 줄 알았는데, 실은 인정을 바랐다. 나는 천천히 돌아가는 중이다. 글을 처음으로 쓰고 싶었던 시점으로, 내가 처음으로 꿈을 품었던 때로. 아이가 처음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순간은 쉽게 꿈으로 자리한다.


나는 하고 싶은 말도 잘 못하는 어눌한 아이였다. 대면 상태로는 부끄러워서 혹은 상대가 불편할까봐 할말을 삼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글을 쓸 때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용기가 솟았다. 그렇게 하나 둘 쓰기 시작한 글이 어쩌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눈에 띄었다. 처음으로 내가 세상에 드러난 기분이었다. 내가 드러난 순간에는 늘 글이 있었다. 그 순간에만 나는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나를 살리는 듯 보이던 글에 뛰어든 순간 죽고 싶었다. 너무 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가사처럼 너무 큰 꿈은 꿈이 아니었다. 그 먹먹한 순간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아직 대체된 순간은 없었다. 결국 내 삶을 통틀어서 단 하나라도 만족할 글을 쓰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지금은 방황하고 있지만 이 고된 과정은 결국 글로 만들겠다는 근거 없는 포부도 있다. 그러니까 나를 죽여도 결국 나는 글로 돌아간다. 평탄치 못한 삶을 후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단이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내 선택의 옳고 그름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결정하는 순간 끝나는 듯 보여도 인생은 이어가며 긴 자취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락은 언제나 바꿀 수 있다. 그게 내가 문학에서 배운 점이다.


그럼에도 아직 나는 물 아래 잠긴 듯 갑갑하다. 심연에 푹 빠져들었을 때는 주변의 조언이나 불안도 느끼질 못했다. 빛이 무엇인지 남이 무엇을 하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막상 물표면으로 올라오니 다른 게 보였다. 내가 몰랐던, 어쩌면 가질 수 있었던 빛이 장력 너머로 넘실댔다. 결국 내 자괴감이나 눈물의 원천은 어설픔이었다. 평생 아가미로 호흡하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설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 다시 내려가자니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함, 그 사이에서 계속 근근히 버티고 있다.


모든 이들이 그렇듯 나도 양가적 감정을 오가는 중이다. 이런 비정형적 삶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고 있다는 의식과 사회적 시선에서는 의미없는 방황으로 여겨져 결국 도태된다는 두려움이다. 나는 아직 내 삶을 표현할 방법을 찾고 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아직 모르겠다. 그 모호한 상태를 말하려다보니 계속 혀가 꼬인다.


이번 달 내내 사람을 상대하면서 내 삶을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말로는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내 가치관을 설명하자니 장황하고, 설명하지 않자니 미묘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효율이나 생산 측면에서 본다면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내 삶으로 표현하자면 타인의 욕구가 아닌 자신에게 충실해지는 방법이었다. 모두가 탄탄대로를 달리거나 모험가가 될 필요는 없다. 누군가의 열정이 더 크고 작은지 대결하는 자리도 아니다. 나는 그 모든 요구에서 떨어져 그저 나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도 막상 사람을 대하면 내가 작아보였다. 하루는 문학을 전공했다는 말에 상대가 웃었다. 내가 후회한 적 없는 삶을 상대가 비웃는 순간 꾸짖지 못한 까닭은 자신이 없어서였다. 왜 말하지 못했을까, 그 과거 만큼은 후회한다.


나는 내 삶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가도 잃는다. 왜 그런 걸까, 그저 인정하면 될텐데 쉽지 않다. 계속 사회와 자신을 견주고 평가하게 된다. 이 글도 그런 중얼거림 중 일부다. 나는 성공하고 싶은지, 무엇을 이루려는지, 목적이 뭔지 어떤 때는 명확하게 보이고, 어느 순간에는 흐릿해진다. '왜'라고 물어오면 그제서야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진다. 그러니까, 주머니에 지난 영수증이나 일기가 잡히긴 하는데 그걸로 내 삶을 표현하기엔 애매했다. 결국 이야기가 필요한데 대면한 상태에서는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대화 내내 상대를 붙들고 내 사상을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그 정도 능력치라면 이미 어떤 강단 위에 서고도 남았다.


그러니까 이런 미지근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는게 보통의 삶이다. 어떤 질문에는 해답이 명확하고 어떤 행동에는 근거가 불분명하다. 상대가 설명을 원한다고 모두 말할 필요는 없다. 모호한 상태가 진실이라면 그대로 표현하면 된다. 그럼에도 나는 설명할 필요성을 느껴서 다급하게 헛소릴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후회한다. 요즘은 여름이라 이불을 덮지 않으니 혼자 뒤척이다가, 역시 사람을 덜 만나고 글을 써야 하나, 홀로 결론을 내린다. 나아갈 듯하면 물러서고, 물러설듯하면 나아가는 기행을 펼치는 중이다. 아주 근면성실하지도 않고 아주 포기할 결단성이 부족한 모습이 아쉽게도 내 성정이고, 그게 진심이기 때문이다.


다들 글은 꾸준히 작성하는 근면성실한 활동이라고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생기고 나서야 돌아온다. 누군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누군가는 과묵할 수 있다. 과거에는 내 정신과 경험이 빈약한 탓이라고 자책했지만 지금은 그냥 과묵한 편이라고 조금은 위로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냥 자기위로라도 나와 비슷하게 소박하고 미련하고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대화를 하고 싶어서 돌아왔다. 더 잘난 사람이 아니라 더 못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대체 그게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