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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씨드 Jun 22. 2022

쉼표를 찍는 한 땀

“…… 아, 제가 지금 밖인데요. 그냥 문 앞에 두고 가세요.”


“…… 선생님, 저 M대의 Y입니다.”


“네? 뭐라고요?”


“저 M대의 Y입니다. 택배 기사님인 줄 아셨나 봐요.”


K대 강의를 끝내고 귀가하는 전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휴대폰에 대고 웅얼거리던 나는 화들짝 깨어났다. 휴대폰 너머로 Y 교수의 목소리가 예의 바른 화법에 실려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거, 너무 죄송스런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어제까지가 저희 대학 수강 신청 변경 기간이었는데, 선생님께서 맡으신 ⟪사회와 문화 고전 읽기⟫ 강의에 수강 신청한 학생이 최종적으로 열두 명이 넘지 않아서요…….”


Y 교수는 내 기분을 배려하여 상세하고 조리 있게 강의 개설에 관련된 M대의 규칙을 설명해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번에는 아쉽게도 폐강이 되었지만 다음 학기든 그다음 학기든, 언제라도 꼭 다시 모실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17년 9월, 2학기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이렇게 해서 강의 하나가 사라졌다. 2시간 반 이상을 운전해야 하는 거리였으므로 요모조모 따져서 시간표를 짜 놓았는데 허무하게 되어버렸다. 


“이번 학기에는 조금 바쁘게 움직여야 할 줄 알았는데 구멍이 났네.”


실망감도 있었지만 어긋난 일주일의 시간표에서는 벌써부터 삐그덕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시간강사의 시간표라는 것이 뭐 언제는 안 그랬나. 타도시에 출강이라도 하면 오며 가며 도합 5시간을 까먹는 것은 예사였고, 도로 사정을 뻔히 아는데 늦지 않으려면 충분한 여유를 두고 이동해야 했으며, 그러다 보면 15분에서 30분,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자투리 시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외에도 당황스러운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당황스러울 뿐 아니라 엉뚱하고 생뚱맞은 것이.


고속도로가 조금이라도 덜 혼잡한 시간을 택해 운전을 하려면 식당에 앉아 점심을 먹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M대에 도착하자마자 캠퍼스 어디든 앉아서 도시락을 까먹고 바로 강의실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서 찬장 구석에서 도시락통과 보온병을 꺼냈다. 반투명 플라스틱으로 된 샌드위치용 밀폐용기의 뚜껑에는 연두색 실리콘 패킹이 둘러져 있었고, 커피를 담을 보온병은 초록색 몸체에 연두색 뚜껑이 씌워져 있었다. 우연 반, 의도 반의 깔맞춤 구입의 결과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걸 찬찬히 보고 있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온라인 원단 판매 사이트에 접속해 초록색 천을 찾기 시작했다. 한 달쯤 전의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도시락 파우치와 보온병 커버였다. 난생처음으로 직접 도안을 그려 주머니 형태의 패브릭 소품을 만드는 데에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손바느질 소품 책에 실린 파우치 도안을 참고해 전개도를 그리고, 손바느질로 겉감과 안감을 맞대어 꿰맸다. 여덟 살 때 처음으로 안감 있는 지갑을 만들었는데, 구조를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아무리 뒤집고 또 뒤집어도 올이 솔솔 풀리는 솔기들이 지저분하게 드러나서 결국 다 뜯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원리는 단순하다. 겉감의 겉과 안감의 겉을 마주 대어 포개기. 그러면 자연히 양쪽 다 뒷면이 바깥으로 위치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 창구멍이 될 몇 센티미터를 남겨놓고 두 장의 천을 꿰맨 다음 창구멍으로 뒤집으면 솔기는 안쪽으로 들어가고 깔끔하게 접힌 선이 밖으로 나오게 된다. 2겹으로 된 모든 주머니 형태의 소품과 안감 있는 의복의 구조다. 구조상으로는 단순하지만 그 제작 공정은 여덟 살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신비스러웠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꼬마는 끝까지 방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 안감의 시접을 미리 접어서 겉에서 공구르기로 붙여 넣었고, 그 결과 삐뚤삐뚤 못생긴 완성작이 탄생했다. 


그때의 실수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두 겹으로 된 입체의 구조와 바느질의 원리를 파악하느라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정작 이제 와 M대에 갈 필요가 없어지다니. 강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내게 남은 것은 도시락 파우치 한 세트뿐. 알맹이는 날아가고 껍데기만 남았다. 


그런데 파우치라는 것이 워낙에 껍데기가 아니었던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물건. 있으면 좋지만 어디까지나 겉껍질. 강의가 폐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애당초 꼭 있어야 하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그것을 만든 과정은 마치 필수적인 일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원단 선택에서부터 가시 도트 단추를 박아 마무리하기까지, 매 단계마다 고민을 거듭해 결정을 내렸고, 매 결정마다 확신이 서지 않으면 실행하지 않았다. 그 모든 일들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도 같았고, 그 모든 선택들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과도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때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 속에서 내가 경험한 최고의 몰입과 같은 정도의 깊이와 에너지로 거기 몰두했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껍데기가 아니었다. 껍데기라는 형식을 가진 무엇인가 다른 것이었다.


그걸 만들 시간에 처음 맡는 그 강의를 조금 더 철저히 준비했더라면, 이라는 질문은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후 그 질문이 떠올랐을 때 약간의 충격과 함께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하지만 그건 전제부터 잘못된 질문이었다. 5년 차 강사였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눈치가 한참 모자랐지만, 첫 강의에서 나를 바라보던 학생들의 시선에 섞인 의혹은 읽을 수 있었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전공과목이었던 그 과목을 전년도까지 강의했던 그 학교의 A 교수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강의 능력이란 종합적인 것이어서 한 달 동안의 준비로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역량이란 오랫동안 꾸준히 쌓이는 것이다. 어느 순간 비약적으로 커질 수는 있지만 그 폭발력은 천천히 준비된다. 어쩌면 나는 첫 시간 전에 A 교수를 만나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을 포함해서, 누구나 자기 깜냥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단기간에 미친 듯이 노력한다고 해서 뻥 튀겨지지 않는다. 그게 바로 역량이라는 것이다.  5년 전 나의 강의 역량은 첫 강의에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무엇인가를 기대했을 그 학생들을 설득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내가 짠 강의계획서가 A 교수의 것보다 훨씬 더 오밀조밀했음에도.


시간은 서로 치환될 수 없다. 치환은 두 항이 동질적일 때에만 가능하다. 질적 차이가 소거된 두 항이란 수학 공식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천으로 소품을 만든 시간을 무엇인가와 비교할 수 있다면 그건 강의를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실망감과 함께 무수히 겉감과 안감을 뒤집었던 꼬마의 시간이다. 


삐뚜른 땀으로 바늘을 놀리던 여덟 살짜리 꼬마의 손은 세심함과 야무짐의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여덟 살 이후 바느질은 가정, 가사 시간에 한 것이 다였지만, 다른 많은 반복된 경험들은 아마도 미처 짐작하지 못한 사이에 그 아이의 손을 키웠을 것이다. 도서관 복사실에서 복사용지를 반듯하게 갈무리해 스테이플을 찍고, 시도 때도 없이 책상 위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아침마다 매끈하게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거나 분리수거할 쓰레기를 정리하는, 그런 무수히 많은 일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거의 40년에 걸쳐 축적된 잠재력이 현실적인 역량으로 전환된 사건이다.


공깃돌을 담아 두는 용도로 오랫동안 간직했던 그 최초의 빨간 플라넬 지갑에 비해, 20수 면과 방수 천으로 새로 만든 초록색 파우치들은 단정하고 새침했다. 여전히 수더분한 느낌이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스스로의 손을 놀려 무엇인가를 만든 그 시간은 분명 쉼표를 찍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의 결은 결코 느슨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미 나는 느끼고 있었다. 이 시간의 밀도가 치밀하다는 것을. 아니, 치밀하다 못해 조금 과밀하다는 것을.


쉼표를 찍는 첫번째 한 땀이 된 도시락 파우치 세트 (201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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