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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씨드 Jul 22. 2022

가위집을 만들다

껍데기인데 껍데기가 아니었던 첫 번째 작품, 초록색 도시락 파우치 세트를 완성했을 때, 곧바로 착수해야 할 작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락 파우치 세트와 함께 구상하기 시작했던 가위집이었다. 디자인을 정하고 조각을 잇기 시작한 것은 사실 가위집이 먼저였지만, 아무런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고 보니 난관에 부딪쳐서 멈춰 두었던 작업이다. 손바느질과 기계 재봉을 통틀어 모든 바느질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도구 중 하나인 재단 가위를 안전하고 우아하게 수납할 일이 시급해서 당장 착수했는데, 알아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


우선 형태부터가 문제였다. 책에서도 인터넷에서도 가위집 도안을 찾을 수 없었다. 도안 찾기를 멈추고 완성품의 사진을 찾기 시작하자 희망이 보였다. 어느 규방공예 블로그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아내 적당한 크기로 프린트해서 도안을 만들고, 원단 판매점에서 사은품으로 받았던 누비천 조각을 덧대기로 했다. 


가지고 있었던 천들을 가지고 패치워크를 해보았다. 보관하고 있었던 청바지 밑단 조각, 오래전에 마르세유 구시가지에서 떠돌이 아랍 상인에게서 샀던 왁스 천*, 그리고 가지고 있었던 작은 주황색 면 조각을 이어 붙였다. 


무작정 시작된 패치워크


청바지 밑단의 이음 부분을 그대로 살리고 주황색 실로 스티치를 넣을 때까지는 순조로웠는데, 앞판, 뒤판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어서 또 멈췄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해나간 방법은 상당히 손이 많이 가고 어려운 방식이었다. 앞판, 뒤판에 각각 따로 누비천을 덧대어 시침질로 고정한 다음 각각 바이어스 테이프를 둘러 마감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아무래도 가위가 들어가는 면이 좀 더 매끄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라미네이트** 원단 조각을 각각 안쪽에 새발뜨기로 꿰매어 붙였다.


바이어스 테이프 바인딩
라미네이트 조각 덧대기


마침내 마지막 순서. 앞판과 뒤판의 합봉은 전통 규방 바느질의 방식대로 사뜨기***를 할 생각이었으나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스티치 모양이 안 나와서 수없이 뜯고 다시 하기를 반복하다가 좀 괜찮게 되었다 싶었을 때 실이 모자라서 멈췄다. 새로 구입한 실의 색깔이 애초의 실 색깔과 너무 달라서 다시 뜯고, 처음부터 다시 하려니 또다시 스티치가 엉망이었다. 사뜨기를 포기하고 무슨 바느질법인지도 모를 주먹구구 바느질로 이어 붙였다.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이음매 바느질은 결코 가지런하지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는 손색이 없어 보였다.


합봉 바느질
완성된 가위집 앞면
완성된 가위집 뒷면 (2017. 10.)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로 일단 시작하고 보았던 작업. ⟪호빗⟫과 ⟪반지의 제왕⟫의 거대한 서사가 톨키엔이 조카에게 들려주었던 한 마디, “땅속 어느 굴에 호빗이 살고 있었단다.”에서 풀려나왔던 것처럼, 반짇고리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낸 천 조각들로 난생처음 시도한 패치워크로부터 그 후의 모든 것들이 풀려나왔다. 


10년 전 여행지에서 충동적으로 구입한 이국적인 천. 그 천에 프린트되어 있었던, 데님을 연상시키는 인디고 블루와 신선하고 자극적인 주황. 


주황색. 또는 북아프리카 타진**** 그릇 속의 익힌 홍당무 조각. 속 껍질 벗긴 오렌지 과육. 마르세유의 태양. 남프랑스 사람들의 그을린 피부. 대낮 땡볕 아래 거미줄 같이 얽힌 오래된 골목길을 걷던, 어디로 갈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던 한 사람.


전체 과정을 결정하지 않은 채로 무조건 시작한 작업. 애초의 생각을 바꿔나가며 임기응변으로 해나갔던 모험. 막힐 때마다 며칠씩 멈춰가며 한 달 넘게 걸려 완성한 손바느질의 결과물. 그때 이후로는 손바느질로만 만드는 일도, 계획 없이 시작하는 일도 없었지만, 실은 ⟪느린 손 프로젝트⟫ 전체가 수작업과 무계획과 멈춤으로 점철된 그 작업과 같았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풀려나왔다.


가위집의 주황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느린 손 프로젝트⟫의 중요한 색으로 지속되었다. 가위집을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아하는 색깔을 묻는 나에게 친구가 주황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가위집에 사용했던 주황색 천 조각은 보잘것없이 작아서, 패치워크를 하고 나니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오렌지색 천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다. 친구에게 시리즈로 소품을 만들어주겠다며 ‘오렌지 프로젝트’라 명명한 거창한 계획의 첫 단계였다. 가위집의 주황과 비슷한 강렬하고 깨끗한 채도 높은 주황을 원했는데 의외로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미묘하게 어둡거나, 구리거나, 아니면 형광 또는 파스텔 톤이었다. 도시락 파우치 세트를 만들기 위해 초록색 천을 찾을 때부터 이미 감을 잡았지만, 바느질 작업에서 가장 어려운 요소 중 하나가 원단 선택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오렌지 파우치 (2017. 10.)
오렌지 필통 (2017. 10.)
오렌지 가방 (2018. 4.)


동대문시장이나 광장시장이 집에서 버스로 40-50분 거리에 있음에도 매번 온라인 구매를 택한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는지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그다지 나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단천국, 천싸요, 천가게, 인패브릭, 그린패브릭, 삼식이원단, 천나라 등 대구에 근거지를 둔 다수의 큰 매장과, 광주의 패션스타트, 그리고 코튼빌, 네스홈, 데일리라이크 등의 브랜드 원단몰들이 온라인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같은 시간 동안 발품을 팔아 동대문시장을 뒤지는 것보다 더 많은 원단을 보았을 거다. 


‘원단빨로 먹고 들어간’ 작품들은 그러니까 엄청난 시간을 온라인 매장에서 보낸 결과다. 그다음 단계는 조합을 뽑아내는 일이다. 그 시기부터 생긴 새로운 습관은 내가 ‘포목점 놀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구입한 원단들을 선세탁해서***** 거실에 건조대를 펴놓고 말리면서, 마르는 동안 오며 가며 바라보거나 만져보는 일이다. 원단과 디자인의 매치, 또는 여러 원단의 배색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며칠간 포목점 놀이를 하고 나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다. 오렌지 프로젝트의 작품들도 그랬지만, ‘종이 프린트 시리즈’도 그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네스홈의 프린트 리넨이 없었다면 결코 나오지 못했을 작품들이다.


모눈종이 프린트 파우치 (2018. 1.)
원고지 파우치 (2018. 1.)
노트 프린트 파우치 (2018. 1.)
모눈종이 프린트 파우치 (2018. 1.)


소품을 만들어 판매해볼까 지금까지 여러 번 고민했지만 매번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최적의 조합을 창출하는 데 그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또 다른 요소들이 들어온다면? 단가를 맞추기 위한 비용 계산, 원가 절감, 시간 효율이 기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면? 그렇게 되면 이 잔잔한 만족과 즐거움은 영영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들쑥날쑥 멈춤이 잦은 리듬에 적응하는 편을 택했다.  


무엇인가에 ‘올인하는’ 것만큼이나, 그러지 않으면서 지속하는 일도 어렵고 수고스럽다.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느림에서 오는 온전한 즐거움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

*제국주의 시대에 네덜란드 면직물 회사들은 인도네시아 전통 직물인 바틱(Batik) 천을 기계 염색 공정으로 생산해서 아프리카에 유통시켰는데,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화려한 패턴을 특징으로 하는 이 직물은 ‘왁스 천(wax tissu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아프리카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1900년 무렵부터 서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직물로 자리 잡았다. 


**접착액을 바르고 비닐 필름을 씌워 가공한 방수 천을 말한다.


***접합 바느질법의 하나로, X자를 여러 겹으로 교차시켜 튼튼하게 얽는다.


****타진(tajine)은 북아프리카 이슬람 문화권의 요리로, 닭고기, 양고기 등을 채소와 함께 푹 끓여 만드는 스튜 풍의 음식이다.


*****면, 리넨과 같은 자연섬유는 물에 젖으면 줄어드는 성질이 있으므로 미리 물에 한번 담근 뒤 말려서 재단하는데 이를 선세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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