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시절의 작은 승리로 꼽는 몇 가지 작품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다리미집이다. 웨빙끈*만 빼고는 모든 재료가 사은품으로 받은 것이어서, 없는 재료를 가지고 궁리해서 최대한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두터운 모서리를 바이어스 테이프로 바인딩하느라고 재봉틀 바늘이 두둑두둑 부러져서 결국엔 손바느질로 처리하느라 고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호통재라, 바늘이여!
다리미는 가위처럼 반드시 어딘가에 넣어두어야 하는 도구는 아니어서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번엔 또 뭘 만들까 고민하며 인터넷을 뒤지다가 결정했던 품목이다. 가위집이든 다리미집이든 바느질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을 물건들이다.
여기서 가능한 예상 질문. 그럼 그건 바느질을 위한 바느질 아닙니까? 만들기를 위한 만들기 아닙니까? 굳이 왜 만들어야 합니까?
나 또한 한때 의문이 전혀 없지 않았던 바, 이 글을 읽는 그대가 그러한 질문을 떠올렸든 아니었든 간에, 장황하고 서투르나마 나름대로 깊이 숙고하여 답변을 시도해보려 한다.
그대는 ⟨규중칠우쟁론기 閨中七友爭論記⟩나 ⟨조침문 弔針文⟩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전자는 조선 철종조 이후로 추정되는 연대 미상, 작자 미상의 내간체** 수필이고, 후자는 조선 순조 때 유씨부인이 지은 제문(祭文) 형식의 수필이다. 이 고전산문들의 주인공은 모두 바느질 도구들이다.
전자의 주인공은 척부인(尺夫人)(자), 교두각시(交頭)(가위), 세요각시(細腰)(바늘), 청홍각시(靑紅)(실), 감투할미(골무), 인화낭자(引火)(인두), 울낭자(熨)(다리미)이고, 후자의 주인공은 부러진 바늘이다. ⟨규중칠우쟁론기⟩의 일곱 주인공들은 자기가 없으면 어떻게 옷을 짓겠느냐며 서로 자기 공을 다투고, ⟨조침문⟩의 주인공인 바늘은 부러져서 명을 다함으로써 유씨부인의 탄식을 불러일으킨다.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지 우금(于今) 이 십 칠 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짐깐 거두고 심신(心身)을 겨우 진정(鎭定)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너는 미묘(微妙)한 품질(品質)과 특별(特別)한 재치(才致)를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철중(鐵中)의 쟁쟁(錚錚)이라. 민첩(敏捷)하고 날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俠客)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萬古)의 충절(忠節)이라. 추호(秋毫) 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능라(綾羅)와 비단(緋緞)에 난봉(鸞鳳)과 공작(孔雀)을 수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鬼神)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바리요.
(유씨부인, ⟨조침문⟩ 중에서)
나는 ⟨조침문⟩이 저자의 과부 신세 한탄을 위한 비유로만 읽히는 것에 반대하며, ⟨규중칠우쟁론기⟩가 사회적, 정치적 갈등에 대한 메타포로 씌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독해는 모두 바느질이나 손작업을 해보지 않은 책상머리 먹물들의 오해라고 생각한다. 자기 손을 놀려 도구를 다루어 뭔가를 만들어본 사람만이 그 정서를 이해할 수 있다. 손을 놀려 일하는 장인이 작업 과정에서 경험하는 조용한 즐거움의 정서를. 서로 자기 공을 다투는 일곱 친구들의 쟁론을 심각한 갈등으로 오해한다면 자신이 유머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꽉 막힌 자라는 걸 스스로 인증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곱 친구들의 다툼은 실은 저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갈등에 대해 답을 찾는 과정이다. 이 친구도 최고로 매력적이고 저 친구도 더없이 고마운데 대체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할까? 곧 생각 한 마디가 질문의 꼬리를 덥썩 물고, 어느덧 화려한 변론으로 고색창연하게 펼쳐진다. 이제 규방은 엄숙한 법정으로 돌변하고 일곱 친구들은 서로 자신의 공을 논리정연하게 풀어놓으며 공방을 벌인다.
나는 아마도 이 쟁론이 실화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느질은 규방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혼자 하는 작업이지만, 어느 순간 규방의 사방 벽이 새로운 색채로 덧입혀지고 도구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일하는 장인은 혼자가 아니다.
이쯤 되면 그대도 알 것이다. 예부터 바느질 도구들은 규방 장인들에게 생명 없는 물건이 아니라 친구로 여겨졌다는 것을. 그리고 또한 이해했을 것이다. 왜 오늘날의 바느질꾼들이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은 다리미집 같은 물건을 만드는지를. 그것은 소중한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선사하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또한 눈치챘을 것이다. 조선시대 규중 바느질꾼이나 오늘날의 재봉틀 바느질꾼이나, 바느질 도구를 대하는 마음은 한결같다는 것을.
그러므로 바느질 도구를 위한 도구를, 혹은 도구를 위한 도구를 위한 도구를 왜 만드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조물주한테 가서 세상을 왜 만들었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다. 만드는 일이란 워낙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이다. 이러한 연발성 사건을 접할 때 편협한 인간들은 A를 만들기 위해 B를, B를 만들기 위해 C를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라고 질문하며 ‘무한후퇴’라는 논리학적 궁지를 연상하고는 제멋대로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연쇄 과정은 결코 ‘후퇴’가 아니다. 편협한 인간의 머리가 A-B-C라는 순서를 생각해내고는 그것이 존재의 순서인 양 스스로 헛갈려 버렸을 뿐. 이것이 바로 철학자들이 목적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발생론적 순서는 그 반대인 C-B-A이다.
사실은 A를 만들기 위해 B를, B를 만들기 위해 C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 아니라, C를 만들고 보니 그걸 가지고 뚝딱뚝딱 움직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B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B를 가지고 또 잘 놀다 보니 이것저것(Z, Y, X 등)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A였던 것이다!
자, 그러므로 가위집 무용론, 다리미집 허무주의, 핀쿠션 생략론, 나아가 모든 종류의 도구 제작 면제론을 정중히 기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바느질꾼 앞에서 그러한 이론을 펼친다는 것은 감히 조물주 앞에서 천지창조 무용론을 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엄한 일이라는 의견을 조심스레 덧붙이는 바이다.
아니, 대체, 그러니까, 친구들의 친구들을, 그 친구들의 친구들의 친구들을 만들겠다는데! 흠,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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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에코백의 손잡이로 쓰이는 3~4cm 폭의 두툼한 테이프를 ‘웨빙끈’, 또는 ‘웨이빙 끈’이라 한다.
**내간체(內簡體)란 부녀자들이 쓰던 편지의 문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편지, 일기, 수필 등의 문체이며, 일상어에 세련된 글쓰기 기교를 덧붙인 순한글 문체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