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하는 이들이 헝겊 조각으로 만들어내는 수만 가지 앙증맞은 물건들 중에 ‘바늘책(needle book)’이라는 것이 있다. 바늘을 안전하고 찾기 쉽게 수납하는 정리 도구다. 손바느질이든 재봉틀 봉제든 그때그때 용도와 목적에 맞는 바늘을 사용하는 것은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한 필요조건이어서, 바늘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1차적인 분류를 거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서 언제나 손 닿는 곳에 놓여있어야 한다.
바늘쌈지, 바늘꽂이 또는 핀쿠션, 바늘집, 바늘책은 모두 그러한 용도로 쓰이는 수납 도구들로서, 단순하지만 서로 다른 목적에 부합하는 나름의 작은 정리체계들이다.
첫 번째 핀쿠션을 만든 날 저녁에 나는 블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쪼끄만 거 뭐 하나 바느질이나 했으면 좋겠어."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사과 핀쿠션을 만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따 온 사과 한 알입니다.
[…]
꼼짝 않고 사과 핀쿠션을 만든 시간은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이에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순간이 지나자 피로감은 사라지고 정신은 반짝 말끔해졌어요. 12월의 금요일 밤, 일주일의 일과와 2018년 2학기가 마무리된 오늘, 미뤄둔 가사노동을 드디어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 많고 달큼한 사과 한 알 깨물어 먹은 느낌으로.
핀쿠션은 손바늘과 시침핀을 꽂기에는 더 바랄 나위가 없었지만, 재봉틀 바늘을 수납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나는 여러 가지 시스템을 고민해보다가 바늘책을 만들기로 했다. 원단의 두께와 종류에 따라 적절한 호수와 알맞은 유형의 바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바늘들을 제대로 분류해두지 않으면 매번 귀찮은 일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내 바늘책은 갈피마다 서로 다른 호수의 바늘을 꽂도록 디자인되었다. 전철역에서 아파트 분양 광고지와 함께 공짜로 나누어주는 노란 부직포 행주를 잘라 이 책의 낱장들을 만들고, 각각의 페이지에 바늘 호수와 종류를 매직펜으로 표시했다. u는 universal, 즉 일반 바늘을 뜻하고 s는 stretch, 즉 신축성 많은 편직 원단용 바늘을 뜻한다. 예를 들어 11쪽의 s는 11호 스트레치 바늘, 흔히 바느질꾼들 사이에서 ‘블루팁’이라 불리는 바늘이 꽂혀야 할 자리를 표시하는 기호다.
‘MADE IN GERMANY’ 프린트가 찍힌 노랑, 분홍의 부직포 행주들이 정말로 모두 독일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 프린트를 찍은 최초의 기획자는 아마도 유머 감각이 출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거짓말도 이쯤 되면 스타일리시한 조크가 되는 법. 일부러 이 프린트가 찍힌 부분을 살려 부직포를 오려내면서 나는 연신 ㅋㅋㅋ 거리고 있었다.
여밈 부분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게 된 모피 코트 제조업자에게서 ‘나눔’으로 받은 가죽 자투리를 잘라 박아 붙이고 링 도트 단추를 달았다. 단추를 달까 말까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오래도록 써보니 그것은 분명 탁월한 선택이었다. 봉제 작업을 시작할 때 똑딱, 종료할 때 똑딱, 열고 닫는 이 소소한 행위는 개시와 마감의 기분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는 작은 의례가 되었으니까.
2019년에 만든 이 콩알만 한 소품은 여전히 내 재봉틀 오른쪽 나무 접시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듯 자리를 잡고서 나의 봉제 작업을 동반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이 초소형 백과사전을 길잡이 삼아 천의 숲을 탐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