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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씨드 Aug 04. 2022

겨울에 만난 선생님

삶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물질생활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것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지가 200년이 되었다. 의식주 요소들 중에서 그나마 여전히 공장이 아닌 가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면 음식일 것이고, 인류는 더 이상 자신의 옷과 집을 스스로 짓지 않는다. 음식의 영역에서도 대량 소비문화, 체인점, 인스턴트 식품, 간편식 제품의 상륙으로 이제 음식 준비의 모든 과정이 우리 손을 떠날 채비를 끝낸 듯하다.


어느 패턴북의 머리말에서, 직접 옷을 만들어 입는 것만큼 큰 사치는 없다는 문장을 읽었다. 사이즈, 취향, 필요를 통틀어 자신에게 꼭 맞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옷을 만들어 입는 만족감은 비싼 옷을 사 입는 즐거움을 훨씬 넘어선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수고로움이 있다. 원단, 도구, 부자재의 구입과 관리, 패턴의 구입 또는 제도, 일의 계획과 조직, 재단, 재봉, 다림질 등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하나하나가 많은 경험과 숙련을 요한다. 이처럼 커다란 비용을 생각하면 옷을 만들어 입는 일은 정말로 커다란 사치가 아닐 수 없다. 


바느질을 시작하고 석 달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연습 삼아 옷을 만들어 보았지만 그 후로도 1년 정도는 소품 만들기에 전념했다. 작은 물건을 만드는 일이 주는 즐거움에 푹 빠진 탓도 있었지만, 옷 만들기를 위한 기본 지식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의류용 원단의 구입은 소품용 원단을 구입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여러 가지 경험과 지식을 요했고, 소품과는 달리 가장자리에 올이 풀리지 않도록 처리하는 단계를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두 가지 모두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져서, 주위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다른 영역에서는 가방 끈 길이로 남들을 부러워한 적이 없었는데, 재봉에서만큼은 선생님에게서 제대로 배운 이들이 부러웠고 독학하는 내 처지가 서글펐다. 


무엇인가를 강하게 열망하는 사람은 바라는 것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탐지하는 예민한 감각을 자기도 모르게 갖게 되는 것 같다. 2019년 1월에 내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원단 판매 카페에서 알고 지내던 J님의 펜션이 청포대 해변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나는 오래 벼르던 태안 여행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틀 연속 청포대와 꽃지해변에서 잊을 수 없는 일몰, 해변에 밀려온 파도의 얼어붙은 포말, 밤하늘의 별들처럼 모래알 속에 촘촘히 박힌 조개껍데기들의 우주를 실컷 보았다. 그 여행의 거의 모든 시간은 단 두 가지에 할애되었다. 해변 산책, 그리고 J님과의 만남.


남편과 함께 안면도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J님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만능인이다. 지금은 장소를 옮겨 더 큰 펜션을 운영하고 있지만, 당시에 운영하던 중간급 펜션에는 구석구석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커튼과 침구는 그가 직접 만든 것이었고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깔끔하게 청소된 공간에 세심하게 선택된 예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메인 홀에는 J님이 수집한 책들이 빽빽히 꽂힌 풍요로운 서가와 스테인레스가 뿜어내는 금속성 광택으로 멋들어진 커피 머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청소와 리셉션도 그의 역할이라는 말을 듣고서 대체 언제 재봉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리셉션 창구의 안쪽이 바로 재봉방이었던 것이다. 


J님은 나를 그 공간으로 초대해 공업용 재봉틀과 오버록*을 보여주고 기계를 밟아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프런트 데스크의 역할과 작업실을 겸할 수 있도록 동선과 일의 효율을 세심하게 고려해 배치한 그 공간에 들어가 보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큰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공업용 재봉틀과 중고 오버록을 구입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거웠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쌓여있었던 바느질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재봉을 시작한 지 3년 정도밖에 안 된, 나와 같은 독학자였다. 그럼에도 자신과 남편, 친정과 시댁 식구들의 일상복을 거의 책임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가 원단 카페에서 그처럼 많은 원단을 구입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직기 원단**과는 다른 편직 원단***의 재봉 팁을 전수받고 그의 보물 창고 같은 원단방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리고 넉넉하게 나누어 받은 의류용 원단들은 부담 없이 새로운 실험을 해볼 수 있는 소중한 재료가 되었다. 


신축성이 있으면서도 탄탄해서 봉제가 어렵지 않은 코코아색 편직 원단으로는 J님의 조언대로 카디건을 만들었고, 부드러운 털이 보송한, 다루기 편한 합성 털 원단으로는 집에서 입을 원피스를 만들었다. 입어서 편하면서도 초보자가 쉽게 재봉할 수 있는 원단을 고르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혼자서였다면 수많은 실수로 쓸데없는 원단을 잔뜩 쌓은 다음에야 고를 수 있었을 최적의 원단들이었다.


시접 처리를 위한 오버록 기계가 없었던 탓에 노루발****을 이용해 많은 시간을 들여 가장자리를 마감했지만, 여러 번 테스트한 결과 깔끔하고 튼튼하게 봉제할 수 있었다. 그 옷들은 3년 반이 지난 지금도 뜯어진 곳 하나 없이 여전히 잘 입고 있는 나의 최애 실내복으로 남아있다.


소심한 독학 바느질꾼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만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버록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편직 원단을 드디어 다루어보았고, 초보자가 다룰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털 원단으로 성공적으로 옷을 만들었고, J님에게 들은 방식대로 바지 패턴에 절개를 넣어 카고 팬츠를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이 옷들이 모두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따뜻하고 실용적인, 현실적인 필요에 부합하는 옷들이라는 점이다.


J님 덕분에 나는 멀리 돌아가지 않고도 곧바로 입을 수 있는 손색없는 일상복을 만들 수 있었고, 그 사실은 내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누구에게나 첫발 떼기가 가장 어렵다. 그건 혼자서 못 한다. 내 삶에서 얼마나 많은 첫발들이 있었을까. 그때마다 나타나 살며시 도와준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건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J님이 주신 원단으로 만든 가디건 (2019. 2.). 얼핏 쌈마이 같이 보이는 원단도 다루어보고 입어보아야 진가를 알 수 있다.


J님이 주신 원단으로 만든 겨울 실내복 (2019. 1.)
J님의 설명을 듣고 만들어본 카고 팬츠 (2019. 2.)


———

* 오버록(overlock)은 재단된 천의 가장자리에 올이 풀리지 않도록 바느질하는 용도의 재봉 기계, 또는 그러한 기계로 작업한 바느질을 말한다.


** 직기 원단은 씨실과 날실을 직기에 걸어 짠 천을 말한다.


*** 편직 원단은 실로 뜨개질한 것처럼 짜인 천을 말한다. 신축성이 좋아 티셔츠, 운동복, 속옷에 널리 쓰인다.


**** 노루발은 재봉틀에서 바느질감을 눌러주는 부속품으로, 기본적으로 노루발처럼 갈라진 형태를 하고 있지만 용도에 따라 다양한 기능과 형태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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