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 수 없어, 12월의 봄이야
이 말을 남기고, 쓰디쓴 세월의 잿더미 속에서
삶이라는 배가 마침내 우리 모두를 태워준 것처럼
갓 도착한 아이들을 위해 하나의 삶을 띄우는 거야
— IAM*, ⟨봄을 다시 봐 Revoir un printemps⟩ 중에서
혹독한 겨울의 추위는 봄의 싹 틔움을 위한 필요조건이어서, 2019년 봄은 겨울의 밑거름으로 스프링처럼 튀어 오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약간의 문제라면 타이밍이 조금 삐걱거린다는 점이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나 봄으로 튀어 올라온 개구리가 만일 옷을 입고자 한다면 그건 적어도 겨울옷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계절의 속도는 초보 드레스메이커의 어젠다가 따라가기에는 조금 벅찬 감이 있었다.
1월에 시동이 걸린 후 거의 옷을 만들지 못하다가, 봄이 코앞에 닥친 후에야 코트를 만들 생각을 했다. 코코지니님**의 반코트 패키지***도 진즉 12월에 사두었던 터였다. 안감을 넣는 외투는 난이도가 높은 편이므로 시간 여유를 두고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어본 다음에 시도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여름에 코트를 만들어야 할 판!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을 때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이 머리를 때렸다.
이것이 바로 취미로 옷 만드는 이들에게 사계가 부과하는 영원한 난제다. 계절은 만드는 이의 속도나 진도를 고려하지 않고 저 혼자 신나게 앞으로 달려간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철저히 물질에 복종해야 하는 인간의 의식주 생활은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낭패를 본다. DIY 드레스메이커의 경우 구입한 원단이 산과 계곡을 이룸으로써 낭패는 지극히 물질적으로 현실화된다. 겨울의 초입에 의욕과 희망에 부풀어 욕심껏 장만해두었던 두툼한(이라고 쓰고 어마어마한, 이라고 읽는다) 겨울 원단을 고스란히 어딘가에 넣어두어야 할 때,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럴 만한 공간이 없을 때, 낭패감은 바느질꾼의 영혼을 잠식한다. 그해 봄 약간 무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서둘러 코트를 만들기로 한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현명한 바느질꾼이라면 12월에 미리 봄을 맞고 3월에 여름을 맞을 것이지, 반대로 3월에 허둥지둥 12월을 맞이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생전 처음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에 내리꽂힌 것은 3월이었으니, 어쩔 것인가. 나는 화들짝 튀어올라 코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천상 선생님인 코코지니님이 초보자를 배려해 세심하게 선택한 빨간 하운드 체크 혼방 모직 트위드는 정말 신기할 만큼 바느질이 잘 됐다. 조금 힘든 점이 있다면 트위드 특유의 성질 때문에 납작하게 다림질이 잘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올이 잘 풀리는 편이라는 점이었다.
패키지에 포함된 상세하고 요령 있는 매뉴얼 덕분에 틈틈이 2주 만에 반코트를 완성했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겨울옷을 벗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서울의 3월은 코트의 계절이었다! 오오, 나의 타이밍이 완전히 어긋난 것은 아니로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곰곰 생각해보니 4월까지도 도톰한 재킷을 입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고, 나의 손은 외투 만들기에 이미 재미가 들려 있었다. 가지고 있었던 트위드 원단을 꺼내 요리조리 궁리하다가, 곧바로 서둘러 재킷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트위드는 양모 또는 기타 미리 염색한 실로 짠 옷감으로, 서로 다른 색의 실을 섞어 직조하기 때문에 규칙적이고 입체적인 무늬가 나타난다. 촘촘한 털 때문에 발수성과 보온성이 있어 겨울 기후가 습한 영국에서 실용적인 천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투박하고 거친 촉감 때문에 고급 의류에 사용되지 못하다가, 코코 샤넬 이후 고급 여성복에도 쓰이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다양한 아우터 소재로 애용되는 트위드는 DIY 드레스메이커들에게도 인기 있는 원단이다. 한 번도 트위드 재킷을 입어본 적이 없었기에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샤넬 풍 트위드 원단을 눈에 띄는 대로 몇 가지 구입해뒀었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빨간 하운드 체크 반코트의 원단도 트위드였지만, 이 트위드의 원사는 그보다 매끄럽고 조직은 더 입체감이 있었다. 원사에 꼬임이 많이 들어가서 언뜻 보기에는 올 풀림이 심할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안감을 넣는 옷의 경우 시접 가장자리 마감을 따로 하지 않는 경우도 많으므로 오버록 기계를 갖지 못한 나는 지난번처럼 스리슬쩍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곧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단과 동시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일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두사의 머리칼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뱀들처럼, 꼬불꼬불한 실 끄트머리들이 하염없이 풀어지고 있었다.
“아니, 지가 무슨 이무기야? 용이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왜 혼자서 이리저리 뒤채면서 풀리는 거야?”
샤넬 트위드의 올 풀림에 대해 항간에 떠도는 악명 높은 소문을 들은 바 없지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당황한 나는 애용하던 오버록 노루발****로 가장자리를 단단히 붙들어 두고자 했지만 이 트위드는 그 밑에서 오히려 천 갈래 만 갈래 흩어질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노루발 압력을 낮추고 지그재그 스티치로 모든 둘레를 마감해주고서야 겨우 재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옷 만들기의 기본이 시접 가장자리 처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건 이때 이후였던 것 같다. 많은 고민으로 끙끙 앓던 끝에 5월이 다가오자 마침내 오버록을 구입했다. 공간이 여의치 않아 걱정했지만 한번 마음을 먹자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옷방 한쪽에 새로 작업대를 들이고 작은 학교 책상*****을 구입해 오버록을 따로 놓았다. 오버록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질적인 문제였던 형광등 안정기******를 직접 교체하고 형광등 세 개를 모두 끼워 넣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틈새에서 공간을 끄집어내어 펼쳐놓으니 참으로 보기 좋았다. 나의 봄은 삐걱거리면서도 나름대로 통통 튀어 오르며 어느덧 여름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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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AM은 1989년에 데뷔한 프랑스 힙합 그룹이다.
** 양장기능사이자 소잉디자이너인 코코지니님은 내가 알기로 국내 최초의 온라인 재봉틀 강사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기초부터 옷 만들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무료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코코지니의 친절한 원피스 교실⟫, ⟪코코지니의 친절한 재봉틀 교실⟫이 있다.
*** 패키지란 옷 한 벌을 만들 수 있는 주요 재료로 구성된 상품을 말한다. 주로 패턴, 원단, 단추, 매뉴얼로 구성되며 패턴지, 실, 접착 심지 등의 부자재가 추가되기도 한다.
**** 오버록 대신 사용하는 가장 자리 마감에 특화된 노루발. 오버록처럼 가장자리를 자르면서 실을 감는 것도 있지만 내가 사용하던 것은 커팅 없이 스티치만으로 마감하는 유형이다.
***** 학교와 학원에서 사용하는 1인용 책상으로, 묵직하고 튼튼하고 저렴하다.
****** 형광등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보조 장치로, 대략 수명이 3~5년 정도 되는 저주 받은 소모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