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비 덕분에...
내가 다시 남편에게 반하고 심장이 뛰기 시작한 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내 심장이 멈춰버렸던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처음부터 우리가 위태로웠던 것은 아니다. 시작점이 분명하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을 되새김질해보면 그 시작은 있다. 작고 미묘해서 장난처럼 느껴졌다.
샤프심처럼 얇고 가늘어 심장에 생채기도 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엔 심장이 텅 비어 버렸다.
우리, 플라토닉 사랑만 하자!
몸이 먼저 멀어지니
신혼 초, 우리의 보금자리는 10평이 조금 되지 않는 원룸 오피스텔이다. 집에서 놀고먹고 있는 나의 일과는 아침 일찍 여의도 본사로 출근한 남편을 온종일 집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가끔 9시, 보통 11시 , 늦으면 새벽 1시가 되어야 돌아오는 남편을 집에서 혼자 기다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띡띡띡'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하는 게 없으니 당연히 에너지가 넘치고, 남편이 돌아오면 애정공세를 펼쳤다.
유혹도 해보고, 도발적으로 밀어붙이기도 했지만 남편은 피곤하다며 다음에, 다음에... 를 약속하며 나를 조금씩 밀어냈다. 급기야 남편은 도망치고 나는 쫓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나를 피해 남편이 속옷바람으로 신발장까지 달아났다. 여태 장난이라 여기며 웃으며 넘어왔는데 속옷바람으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치려는 남편을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 플라토닉 사랑만 하자'
이 멘트를 들었던 적이 잡기 놀이를 하기 전인지 후인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플라토닉 사랑이라... 이런 멘트를 날린다면 보통은 여자가 말해야 하지 않을까? 어이없게도 나는 신혼 초 남편에게서 이런 개뼈다귀 같은 말을 들었다. 그 말은 나의 자존심에 큰 스크레치를 낸 말이었고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냈다. 그 후에는 더 이상 애원하지 않았다.
남편의 본사 출근은 6개월 만에 끝이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일그러진 우리 관계가 회복될 순 없었다.
내가 너에게 소홀해지게 된 시작점은
아마도...
사실은 분명히 이때였어.
뒤따라 마음도 멀어지더라
이성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밤새 논의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주제.. 이성 간의 친구관계.
여중, 여고, 여대를 나온 나는 결코 절대로 이성 간에 친구가 될 수 없다 편에 서 있다. 하지만 개방적인 남편은 동성친구보다 이성친구가 더 많다. 카페에서 이성친구와 단둘이 만나기도 하고 여러 명의 여자 친구들 사이에 혼자만 껴서도 잘 어울린다. 내가 여자 친구들과의 약속에 나가는 걸 불쾌해했던 어느 날, 남편은 여자 학교만 나온 내가 불쌍하다며 내가 이성친구가 있다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성친구들을 사귀어 볼 것을 권유했다. 이제 와서 내가 어떻게 성별이 다른 진짜 친구를 만들 수가 있을까. 약이 올라 초등학교 동창회도 나가고 어학 사이트에서 친구도 사귀어보고 헬스장 트레이너와도 친하게 지냈다. 남편의 바람대로 진짜 친구 같지 않은 그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시시 껄껄한 이야기를 하며 지냈다. 헛헛함이 조금은 매워진다고 느꼈고 이때쯤 남편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남편은 과연 나를 진짜로 100%로 믿어서 밤늦게까지 놀고 들어가도 괜찮다고 하는 걸까?
'남편은 질투라는 게 없나?'
'내가 밤늦게 남자를 만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매력이 없나?'
'나를 사랑은 할까?'
남편의 권유대로 친구를 사귀려 했으나 오히려 '이성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내 가치관은 더 확실해졌다.
내가 누구를 만나도 남편은 게이치 않았고 서로에게 소홀해져만 갔다. 이런 부부관계가 계속 유지가 돼도 맞는 건지..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지.. 아무것도 확신이 서 질 않았다. 그냥 이혼이란 걸 할 수 없으니 유지되는 관계처럼 우리의 신혼생활은 결혼 30년 차는 되는 부부처럼 서로에게 무뎌졌다.
세계여행 여행 32일째.
태국 끄라비는 한참 우기이기 때문에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다.
온천욕을 즐기고 돌아가려는데 비가 쏟아졌다. 젖은 수영복을 그대로 입은 채,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스쿠터에 올라탔다. 빗길이라 무서워 남편을 더 꽉 안았다. 뭉툭한 빗방울들이 세차게 열굴에 부딪쳐 아프다.
춥고 따가워 더 웅크리고 남편 등 뒤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 남편이 한 손으로 내 한쪽 다리를 추위로부터 빗방울로부터 감싸 안았다. 앞에서 운전하는 자기가 더 춥고 아플 텐데 바보같이 계속 나에게 미안해한다.
폭우 속을 달리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 가슴에 멍이 생겼을 때부터 내가 마음이 떠버렸을 때까지..
왜 이제야 이 사람의 사랑이 보였을까...
'아직도 나를 많이 사랑하고 아끼는구나.'
세계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당연히 비 오는 날 스쿠터를 타며 빗속을 달릴 일도 없었겠지.
내가 다시 내 상처를 잊고 너를 사랑한 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감싸주던 그때가 잊히지 않는다.
여행 끝에 얻을 결말은
이미 여행의 초반에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