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2주 쉬었다고 벌써 다 좋았던 것처럼 포장하려 든다. 지하철 김포공항역에 내려 국내건 청사로 걸어가는 그 긴 무빙워크에 서있는 나는 마치 도살장 벨트 위 고깃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새벽 4시 택시 타고 출근하는 길 ‘차라리 누가 뒤에서 이 택시를 들이받았으면’ ‘공항에 큰 불이 나서 오늘 하루 근무 못했으면’ 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했었다. 그 정도로 출근이 지옥 같은 때가 있었는데 망각의 동물이란!
힘들 때마다 메모장 일기에 그날 하루의 감정을 쏟아내며 버텼었다. 속으로 삼켰던 위처럼 철없는 생각들을 맘껏 뱉어 놓았다. 오늘 밤 산책엔 그때의 글을 하나씩 꺼내 읽어보았다.
휴일 첫날 오전이라 공항은 붐빈다. 잠시 앉지도 못하고 기계처럼 첫인사, 신분 확인, 보안 질의와 수하물 접수 그리고 마지막 인사까지 반복 또 반복. 이렇게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갑자기 나 스스로가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다. 사실 남아있는 체력도 감정 에너지도 없는데 마치 다 쓴 치약처럼 마지막까지 짜내고 있다가 이런 내가 가엾어진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스치면 빠르게 움직이던 손이 무겁게 느껴져 느려진다. 끝없이 오는 아이 동반 가족, 골프 여행 부부 그리고 또 아이 동반 가족, 부부… 방금 내 눈앞에 온 고객이 전에 왔던 고객 같은 쳇바퀴 속에 갇힌 기분이다. 못 들은 채 하거나 때론 웃으면서 넘겼던 앞사람의 투정, 불만 하나하나가 콕콕 가시처럼 박힌다. 숨쉬기가 힘든데 앞의 나만 바라보고 있는 긴 한 줄을 내버려 두고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지금 이 칸막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스크 안에서 쌍욕 뱉으며 조금만 더 조금만 버티는 것뿐이다. 이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순간이 가장 괴롭다. 문득문득 삼켜버리는 이 감정이 찾아보면 몸이 힘든 것보다 더 괴롭다.
- 휴가철에 쓴 일기 중
역시, 그 당시 가장 힘든 게 뭐였냐고 묻는다면 ‘일하고 있던 당시 나 자신이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열심히 한다고 고객도 회사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는 무기력함.
나는 더 이상 서비스를 하고 싶지 않다. 친절함과 웃음으로 돈을 벌고 싶지가 않다. 예의와 양심은 곧 지능이라는 유튜브 영상을 봤는데 크게 공감했다. 지능이 부족한 사람들의 덜 떨어진 말과 행동 때문에 그날 나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이 너무 가엾다. 왜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를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지긋지긋하다. 신분증 던지는 사람, 도대체 언제 봤다고 대뜸 반말이신지. 본인이 마감 시간 한참 지나고 와서 수속 불가라고 하자 대뜸 상욕 하는 사람. 새치기하는 뻔뻔한 사람. 긴 대기줄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카운터 앞에서 짐 정리하느라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는 민폐, 예약할 때 가져오라는 안내문 못 읽었다며 신분증 없는 것을 계속 남 탓하는 사람. 수하물 무게 초과 요금 못 낸다며 무작정 깎아달라고 우기기. 이미 응대 중인데 대뜸 하나만 묻겠다며 내 몸을 터치해 부르며 껴드는 사람. 실컷 앞에서 말하는데 설렁설렁 듣고 대답하더니 나중엔 설명 못 들었다고 딴말하는 사람. 그러다 모든 상황이 불리해지면 갑자기 직원 서비스 태도를 걸고넘어지는 갑질. 특별 대우 당연시 바라면서 기본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록창에 검색하면 나오는 사람들…
인간들이 지긋지긋하다. 어차피 고객 우선으로 편파적으로 해석될 VOC 따위에 예민해야 하는 일도, 쉬는 날에 혹시 그때 당시 일 기억나냐며 연락받는 일도! (하루에 몇 백 명을 보는데 한 달 전 일이 기억나겠냐?)
나는 떠나야겠다. 내가 졌다. 세상에 별별 사람이 다 있네, 남의 돈 벌어먹고 살기 다 이렇게 힘들지 뭐 그렇게 하루하루만 넘기며 버틸 수 없게 이미 지쳐버렸다.
- 어느 날 쓴 일기 중 -
일기에 ‘내가 가엾다’는 말이 계속 나와서 놀랐다. 처음엔 분명하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시작했지만 결국은 나 자신을 지키려고 마무리했구나. 더 서비스하다가 내가 홧병나서 죽겠다.
퇴사한 지금, 조금의 남은 후회도 미련도 없이 몸도 마음도 후련하다는 건 참 다행인 일이다. 일기를 보니 그동안 6년 동안 애썼구나 스스로 칭찬하고 싶다. 고생했다!
* 물론 6년 동안 매일 이랬던 건 아니다. 이 일기는 글로라도 뱉어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최악의 날에 적은 것이다. 일실일득(一失一得)이라고 속한 회사는 별로였지난 함께 속한 마음 맞는 좋은 선후배 덕에 즐거웠던 날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