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산책, 그들의 작은 여행(5)

- 당신의 친절한 이웃, 센티멘탈 무림인

by 블랙스톤

한참이나 떠들던 에미는 어느새 다가온 사내, 장 씨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약간은 수척하고 지쳐 보이는 그는 백화곡의 여인들이 골라준 감청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가진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무복 덕에 그는 뭔가 고독하고 노련해 보이는 무림인 같았다.

무표정으로 다가와 살짝 미소 지으며 인사하는 그에게 에미도 마주 인사를 건넸다. 그의 마음에는 아직 풀 한 포기에 줄 물도, 그런 물이 흐를 땅도 없었지만, 적어도 에미와 하게 된 이 역할극에서 작은 미소를 보일 찰나는 가지게 되었다. 아직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에미였다.


장 씨를 따라간 곳에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좋은 옷을 멋있게 차려입은 사내는 에미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에미는 익숙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았고 당연하다는 듯 쁘니가 에미의 곁에 다가왔다.

젊은 사내는 쁘니의 작은 가방에서 튀어나오는 간단한 핑거푸드와 차와 찻잔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백화곡이니 신비한 능력이니 하는 건 다 이 가방 때문에 난 소문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차를 따르는 것을 잊지 않는 에미였다.


방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난동을 부려 제압당한 이들이 생기면서 장 씨가 강하다는 소문이 나자 그저 무릎을 꿇고 해답을 원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에미는 그저 이야기나 듣자 하는 심정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한데 속을 곪게 하는 이야기를 쏟아낸 이들이 후련하게 돌아서며 해답을 얻었다고 말한 것이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이 커지면서 에미의 일행을 따라오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끼리 순서를 정해 에미와의 면담을 신청했다.

에미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이들의 고민이 해결될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일만 키우고 있는 에미를 보며 쁘니가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로.


아주 사소한 이야기부터 무거운 이야기까지 에미는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음식과 차를 내주었다.

에미의 답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속에 담겨 있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들에겐 순수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들의 이야기에 담겨있는 작은 진심을 찾아 공감하거나 손을 잡아주길 바랐다.


에미는 ‘이바구’의 음식과 차의 힘을 빌려 그들의 속마음에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되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의 작은 공감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그저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갈 수 있도록 위로하고 토닥여줄 작은 공감, 그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오늘 만난 젊은 사내는 가문의 반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억지로 헤어져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에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내는 에미가 따라주는 차와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사랑하게 된 이야기, 가문의 반대와 그것에 얽힌 과거 이야기, 둘이 함께 하기 위해 무림을 나섰다가 다시 잡혀와 헤어져버린 이야기를 해주었다.

에미는 연신 그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사를 붙여주었다. 사내는 이야기가 끝나고 조심스레 에미에게 물었다. 가문 사이에 중재를 좀 서주면 안 되겠느냐고.


에미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녀를 사랑하나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보다도 더? 사내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보다도 더? 사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모든 것보다도 더? 사내는 입술을 꾹 다물고,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미는 방긋 웃어주었다.


“부럽네요. 저만이 아니라 모두 부러워할 거예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불안해하지 말아요.

중재를 하는 건 가문의 태도를 바꿔 놓을 테지만 서로가 사랑하는 건 가문의 마음을 돌려놓을 테니.

아니면 뭐 어때요. 당신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랑을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은 거잖아요. 아무것도 불안해하지 말아요.

그분도 당신이 사랑하는 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테니.

그렇게 서로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더 힘껏 사랑해야 하잖아요.

힘들겠지만 부럽네요. 그런 사랑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힘들게 살아가거든요.

적어도 당신들은 함께 있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사람을 얻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어때요? 중재보다 이 대답이 더 낫죠? 확실해요. 그녀는 당신만큼, 어쩌면 당신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답니다.


에미는 작지만 명료하면서 힘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에미가 건네준 차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생각이 정리된 사내는 굳은 얼굴로 에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하늘을 날고 싶지만 아직 날지 못하는 이가 다음으로 들어왔고 에미는 하늘을 순간적으로 날 듯이 보이는 사내의 경공을 칭찬했다.

더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사내가 점점 더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것이란 말도 덧붙여 주었다.


무공이 강해져도 여자를 만나지 못하는 무인이 세 번째.

천하에 이름을 날리면 여자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여전히 여자 앞에서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에미는 웃으며 당신은 어떤 모습일 때 가장 멋있느냐고 물었다.

사내는 아무래도 가장 자신 있는 것은 무공이라고 답했고 에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때론 천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많은 의미를 가질 때도 있으니 굳이 말로 표현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하고 싶은 말과 전하고 싶은 마음을 행동에 꾹꾹 담아서 보여주는 것이 당신이 그녀에게 전하는 가장 멋진 말이 될 거라 말해주자 사내는 크게 웃었다.


그 외에 올해 비가 오지 않아 큰맘 먹고 왔다는 농부를 만났다.

비를 내려달라는 농부의 말에 당황하던 에미는 눈짓을 보내는 장 씨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농부에게 장 씨를 딸려 보냈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돌아온 장 씨는 우물 하나를 파고 물을 댈 수 있는 작은 저수지를 만들어주었노라고 말했다.

입과 눈이 위쪽으로 늘어난 동그라미처럼 변해버린 에미와 쁘니를 보고는 장 씨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에미를 만나기 위해 모여든 무림인들 중에서 자원자를 받아 같이 다녀왔다고.

아직 자신은 산을 뒤엎고 호수를 만드는 기적 같은 강자가 아니라고도 말했다.


해가 질 때쯤엔 함께 하는 여인들과 모여 저녁을 먹고 앉아서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하고 듣는 시간을 가졌다.

사소한 하루의 일과는 그것을 보내는 사람에 따라서 수많은 이야기로 바뀌었다.

같은 시간에 꽃을 보는 사람과 주변을 산책해 보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보듬고 위로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멍하니 앉은 사람, 책을 보는 사람, 무공을 배우는 사람, 무림인과의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 있었으며 같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벌써 애인이 생긴 사람도 있었다.


에미는 그들의 틈에서 웃으며 이야기를 듣는 이 시간이 즐거웠다.

마스터가 해주었던 이야기도 가끔 떠올렸다. 그럴 때면 이제야 이해가 되는 그 이야기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조금은 자신이 자란 듯해서 기분도 좋아졌다.

손님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 ‘이바구’의 규칙 중 ‘이야기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어쩌면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었다.

가장 깊게 몰입할 수 있었던 순간들의 이야기. 혼자만의 시간에 자꾸만 곱씹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

오래오래 떠오르는 추억도 중요한 이야기지만 가장 최근의 중요한 순간도 그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어렵다고 고개를 흔들면서도 에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빤히 바라보는 쁘니에게 말했다.


너는 알고 있었지? 마스터가 굳이 내게 이곳으로 ‘여행’을 가라고 한 의미를?


쁘니는 능청스럽게 평범한 고양이인척 뭔 소리냐는 듯 냐옹, 하고 울었다.

그리고 관심 없다는 듯 턱을 앞발 위에 올리며 자려는 자세를 취했는데 그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게 명백하게 미소를 띠고 있어서 에미도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손님이 찾아왔다. 아직 아무도 속이지 못했던 장 씨의 이목(耳目)과 기감(氣感)을 속이고 에미 앞에 나타난 사내.

에미는 쁘니를 머리에 얹고 달을 보며 가볍게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움을 표시했다.

사내 또한 에미와 쁘니를 보며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러다가 에미가 사내를 부르자 슬쩍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에미와 쁘니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이것으로 사내의 호칭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 씨 아저씨!”

“아니, 그, 아저씨란 표현은 조금. 대협(大俠)이나 공(公)이란 말도 있는데.”

“애 아빠면 아저씨죠. 안 그래요?”

“그렇긴 한데. 대놓고 본인 앞에서 아저씨라고 칭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거, 참.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데 기분이 묘하오.”


여전히 고풍스러운 말투를 사용하는 사내를 보며 에미는 이 여행의 끝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즐거웠던 마음이 컸기에 아쉬움도 클 수밖에 없었지만 왠지 그게 나쁘지 않았다.

아쉽다고 해서 즐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아직 남은 시간이 있으니까.

더 즐겁게 보내야겠다. 에미의 혼잣말에 사내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그러다 에미가 고개를 들자 물었다.


“어찌 선녀(仙女)께서 혼자 오셨소? 진인(眞人)께서는 안보이시는구려.”

“심부름이요. 이야기를 너무 잘 들으셨다고 선물을 보내셨어요.”

“선물?”


사내는 선물이라는 말을 되뇌며 슬쩍 쁘니를 바라보았고 졸지에 선물이 될 뻔한 쁘니는 털을 곧추세우며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냥!

에미는 슬쩍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사내에게 말했다.


부인에게도 맛 보여주고 싶다고 하신 음식이요.


사내는 에미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반색했다. 안 그래도 선경(仙境)의 음식에 대해 말했다가 꿈꾸는 소리 말라며 구박을 들었다고.

에미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래서 그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던 제가 직접 찾아왔다고 말했다.

사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미소를 보이다가 슬쩍 쁘니를 바라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부인은 용호탕(龍虎湯)이나 고양이 고기는 먹지 않소이다만은.”


에미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니야앙! 쁘니는 참지 못하고 에미의 머리를 박차고 설 씨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당황하면서도 무공을 통해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바구’에서 도대체 뭘 먹고 자라고 뭘 배운 것인지 허공을 박차며 쁘니가 연속해서 달려들자 크게 놀랐다.

그는 연신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이리저리 한참이나 쁘니를 피해야 했다.

에미가 부르자 바닥에 붙어 엉덩이를 흔들며 공격자세를 잡던 쁘니가 슬쩍 자세를 풀고는 설 씨를 위아래로 째려보았다. 그리고 에미에게 돌아왔다.

에미는 어깨에 자리 잡은 쁘니의 가방에서 차와 찻잔을 꺼내어 사내에게 차를 건넸다.

잠깐사이에 이루어진 쁘니의 공격이 매서웠는지 슬쩍 호흡을 가다듬던 사내는 차를 꺼내는 작은 가방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중하게 자세를 취하며 쁘니에게 사과를 전했다.


“신수(神獸)를 몰라 뵈어 죄송하오. 그저 간단한 농을 한다고 한 것인데. 기분이 상하실만 하였소. 이 설 모(某)가 다시 한번 사죄드리오.”


쁘니는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슬쩍 끄덕이며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괜히 헛기침을 하며 슬쩍 눈치를 보는 사내에게 에미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쁘니의 가방에 든 음식은 쏟아지지 않았답니다.


그제야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하는 듯했다. 쁘니는 슬쩍 에미의 귀에 가까이 입을 대고는 작게 말했다. 야옹.

에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앞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도 계속 설 씨 아저씨라고 부를게. 그렇게 할 테니 기분 풀어.


사내는 작게 속삭인 말을 들었는지 멋쩍게 웃었고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겉옷도 제대로 못 입은 장 씨가 떨어져 내렸다.

큰 낫을 들어 에미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한 장 씨는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나타나 있는 사내를 보고 크게 경계하는 듯했다.


에미는 쁘니를 슬쩍 흘겼다. 네가 난리 치는 바람에 장 씨 아저씨도 깼잖아.

쁘니는 갑자기 그루밍을 하기 시작했고 에미는 어이가 없어서 툭 하고 어깨를 털었다.

쁘니는 뒷발과 뱃살로 에미의 어깨를 꽉 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그 천연덕스러운 그루밍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들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는 설 씨와 큰 낫을 치켜들고 언제든 공격할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 씨가 보였다. 그리고 은은한 달빛이 이들 사이에 내려앉아 있었다.

이 한밤중의 소동이 꼭 꿈만 같이 느껴지는 것은 저 은은한 달빛 덕분이리라.


에미는 크게 웃었다. 그녀가 웃자 설 씨도 고개를 내려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렇게 웃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장 씨만이 치켜든 낫을 내려야 하는지 마는지 몰라 어정쩡한 자세를 계속 유지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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