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친절한 이웃, 센티멘탈 무림인
그 밤은 길었다.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니 도저히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설 씨가 ‘이바구’를 다녀온 지 벌써 몇 년이나 흘렀다는 것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최근 부인이 둘째를 임신했다는 이야기로 끝이 났다.
마스터가 지금에야 자신을 보낸 이유를 궁금해하던 에미는 임신 중이라는 부인의 소식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보양식을 해주라고 보내신 건가?
쁘니의 꼬리 끝이 에미의 머리를 툭툭 치는 것에서 한심하다는 뜻이 느껴졌지만 에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고양이가 사람을 한심하게 보는 것이.
설 씨의 이야기를 함께 듣던 장 씨는 내내 동요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정사대전을 끝낸 이가 설 씨라는 것에는 눈썹만 꿈틀 했던 장 씨였지만 그가 신선이 사는 곳에서 만난 이가 에미라는 것에는 고개를 획 돌려 에미를 쳐다볼 정도로 놀랐다.
에미가 신선의 선물을 설 씨에게 전달하기 위해 여행 중이었단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장 씨는 이제 선물을 전하고 나면 이 여정도 끝이라는 생각에 맥이 탁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에미를 돕기로 한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 무너진 동굴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살짝 느슨해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런 장 씨를 쁘니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장 씨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어 정신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에미는 현재 설 씨가 향하는 곳에 대해서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배가 불러오는 부인이 쉴 수 있는 곳으로 향한다는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하던 에미는 이내 손을 탁 하고 쳤다. 그리곤 장 씨를 돌아보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여행의 마지막은 역시 축제 아니겠어요?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 뭔가 재밌는 상상을 하는 듯한 에미의 미소도 불안했지만 에미의 어깨에 앉아 한 손으로 가린 입가를 가리고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웃는 쁘니의 모습에 뭔가 많이 불안해지는 장 씨였다.
아침이 되자 에미는 백화곡의 모든 이들을 모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행선지에 대해 말했다.
설 씨에게 선물을 전하고 나면 자신은 떠날 예정이며 하여 마지막을 위한 축제를 할 것이란 말에 백화곡의 여인들은 다양한 반응들을 보여주었다.
우는 이, 웃는 이, 불안해하는 이, 갈팡질팡 하는 이. 백화곡의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하느라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니 장 씨도 불안해졌지만 에미는 태연했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툭툭 치며 뭔가를 이야기하는 쁘니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쁘니를 쓰다듬으며 그 이야기를 듣던 에미가 말했다.
“괜찮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여기 사람들은 백화곡이라고 하면 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더라고. 그러니까 내일은 도구도 다 꺼내서 요리할게.
사람들이야 좀 놀라겠지만 뭐 어때. 이것도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
사람들은 신비(神祕)를 보고 나면 따르거나, 잊거나, 인정하더라고. 결국 다 그렇게 될 거야.”
쁘니는 여전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볼을 부풀렸다. 에미는 웃으며 그런 쁘니를 들어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다만 그 속삭이는 소리가 옆에 선 장 씨에게 들리는 것을 봐서는 저 멀리 선 설 씨가 들으란 듯이 하는 말인 듯했다.
설 씨의 무공은 천하제일이다. 작게 속삭여도 그에게 들리지 않게 몰래 말하기 힘든 판국에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거나 입꼬리를 쓰윽 올리고 있는 둘의 모습을 봐서는 거의 확실했다.
장 씨는 이 둘의 뒤끝이 참 기니 얼마 남지 않은 여정에서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널 나비탕으로 보는 설 씨 '아저씨'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알아. 그래도 '아저씨'를 찾았으니 이제 여행은 곧 끝나. 조금만 참아줘. '아저씨' 것 외에 네 것도 넉넉하게 만들어 줄게. ‘이바구’ 수석 주방장의 특제 간식! 기대되지?”
냐앙! 언제 볼을 부풀렸냐는 듯 두 팔을 들고 밝게 외치는 쁘니의 모습에 에미는 미소를 지으며 쁘니를 품에 꼭 안고 부드러운 털에 볼을 마구 비볐다.
맛있는 음식을 위해서인지 한참을 참아주던 쁘니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솜방망이 주먹으로 마구 내려칠 때까지.
백화곡의 중대발표가 있다는 말에 그들을 뒤따르던 이들이 모두 모였다. 멀리서 눈치를 보거나 감시를 하던 이들도 모두 모여서 숨죽이고 에미만 바라보았다.
에미는 싱긋 웃고는 크게 외쳤다.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됐어요. 우리 웃으면서 헤어져요. 그러니까 마지막 잔치를 시작합시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백화곡의 사람들이 탁자를 꺼내오기 시작했다.
눈이 퉁퉁 부은 여인은 길을 비켜달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연신 웃으며 준비를 하는 여인도 있었다. 애인에게 슬쩍 귀띔을 해주는 여인도 있었기에 사람들은 곧 백화곡과의 면담이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만을 터트리던 이들은 그들에게서 사연을 듣고 꼭 전달해야 할 것은 백화곡주에게 전달하겠다는 장 씨가 나서자 곧 조용해졌다.
사연이고 뭐고 날 설득하지 못하면 내 주먹과 면담해야 할 것이라고 이마에 써붙인 듯한 장 씨가 눈에 힘을 주며 상담하겠다 나섰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소란과는 상관없이 에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야기 듣는 것도 재밌고 여행하는 것도 재밌다. 하지만 ‘이바구’의 요리사인 에미는 사람들이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행복했다.
이제 곧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칭찬할 것을 상상하며 웃었다. 오늘은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이바구’에서처럼 요리할 거란 생각에 더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내 집에서 익숙한 내 것을 가지고 요리하는 것만큼 편한 일은 없으니까.
에미가 요리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감탄사도 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쁘니의 작은 가방에서 튀어나오는 조리도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조리도구가 하늘을 날아서 에미의 손 근처로 날아오는 것을 보고 눈을 비볐으며 하늘을 나는 조리도구가 기다리지 않도록 엄청 빠르게 움직이는 에미의 손에 입을 떡 벌렸다.
웍질을 하다가 손을 높으면 불과 웍(鑊)이 허공 한편으로 날아오르면서 여전히 웍질이 이루어지고 그 사이에 다른 재료를 도마에 올리고 손질한다.
웍질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수저가 알아서 에미의 입으로 간을 볼 수 있도록 다가왔다.
고개를 끄덕이면 웍질이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면 조미료가 에미의 눈에 보이도록 정렬해서는 선택을 기다리는 식이었다.
마치 에미가 요리를 하고 있는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에미를 도와 음식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쁘니의 작은 가방에서는 끊임없이 접시며 젓가락, 그리고 필요한 조리도구가 튀어나왔고 때때로 불도 튀어나왔다.
쁘니는 자기 뒤통수에서 불이 튀어나오는데도 자주 있던 일이라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그루밍에 열중했다.
돕겠다고 나섰던 백화곡의 여인들은 식탁과 의자를 준비하고 에미의 주변에 식재료를 옮겨 놓은 뒤 이 신기한 구경에 집중했다. 연신 추임새를 넣고 감탄을 하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설 씨는 가만히 그런 에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 큰 주방이 좁다고 하더니만. 이유가 있었네.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슬쩍 헛웃음을 터트렸다.
옆의 장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감을 넓혀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 씨는 연신 갸웃거리는 장 씨를 향해 슬쩍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저들은 선경에서 온 이들이라고. 신선의 세계에 속한 이들을 어찌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있겠소. 자연이 알아서 그들에게 협조하고 있으니 기의 흐름은 달라지는 것이 없소.
우리에겐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만 저건 그저 저 소저가 요리를 하는 것뿐이오. 그게 신선의 방식일 뿐인 거지.
아무리 둘러보고 궁리하여도 알 수 없다면, 그저 흐르는 대로 둬야 하는 것 아니겠소. 도무지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우리네 인생처럼.”
그렇게 흐르다 선경에 다녀왔으니 나도 참 운이 억세게 좋은 인생이오. 하고 허허 웃는 설 씨를 보며 장 씨도 에미의 주변에 날아다니는 웍과 냄비를 탐색하던 기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 씨의 너스레에 작게 웃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고수인 둘이 눈앞의 현상을 이해할 수 없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다른 이들이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추종자들은 자기들끼리 허공섭물(虛空攝物)이네, 강력한 기공(氣功)이네, 특이한 기물(奇物)이네 하며 떠들어댔다.
각자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듯 언성을 높이다가도 누군가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백화곡은 뭐 하는 곳이야. 선경이라도 되나? 저리 어린 소저가 허공섭물이든 기공이든 혹은 기물을 사용하였더라도 저런 이적(異蹟)을 행사할 수 있다니.
묘한 침묵 사이에서 누군가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백화곡이니까.
그 한마디가 가진 울림이 에미와 대화를 나눴던 이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들의 고민을 진중하게 들어주고 깊게 생각해 주던 사람.
그녀와의 대화 이후로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혹은 그녀가 내준 음식과 차 때문인지 묘하게 내공의 수발이 더 쉬워지고 원활해졌다.
그것을 대화한 모든 이가 경험했으니 그들은 백화곡의 곡주인 에미에게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백화곡이니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단정하고 나자 눈앞의 광경을 편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이내 누군가 시작한 박수와 환호성을 따라 많은 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 마지막 축제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 환호성을 질렀다.
어차피 헤어지고 떠나야 한다면 에미의 말대로 웃으며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좋으리라.
잔치인지 축제인지 모를 것은 하루를 꼬박 이어졌다. 수백 명의 칭찬에 기분이 매우 좋아진 에미가 자다가도 나와서 웍을 흔들어 댔기 때문이었다.
쁘니는 하품을 하며 잠도 안 자냐는 듯 항의를 했지만 이미 에미는 웍을 흔들며 슬쩍슬쩍 어깨춤까지 추고 있었다. 그 즐거운 기운에 취한 에미에게 잔소리 따위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백화곡의 인원들과 백화곡 추종자들은 웃고 떠들다 잠들고 먹다 지쳐 잠들었다. 부족한 식재료는 쁘니의 가방에서 튀어나왔으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마지막을 연장할 수 있었다.
하루가 모자라 이틀로 접어들고 나서야 쁘니의 냥냥펀치가 에미에게 작렬했다. 수십대를 얻어맞고 나서야 에미는 아쉬워하며 웍(鑊)을 놓았다.
백화곡의 인원들 중 애인을 따라가거나 고향을 찾아가기로 한 몇몇이 에미를 따라가는 인원들과 눈물로 작별을 나눴다.
장 씨를 돕던 이들 중 고향이 같은 이들이 그녀들의 이동을 돕기로 했기에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장 씨는 그들이 충분히 믿을만한 이들이라고 했다.
추종자들 중 몇몇은 백화곡과 장 씨를 따라나섰다. 에미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들 또한 에미를 따라간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헤어짐을 고했어도 일행의 숫자는 오히려 늘었다.
설 씨는 많은 인원에 난감해하다가 이내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가서 부인에게 좀 혼나는 수밖에.
그런 그에게 에미가 말했다. 축제 때는 익숙한 중화요리를 했지만 선물은 좀 다를 거예요. 미식가라고 하셨으니 엄청 맛있는 음식을 조금씩 여러 종류로 내드릴게요.
맛있는 음식과 차를 드시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아, 그리고 마스터가 보낸 진짜 선물인 술도 챙겨 왔으니 걱정 마세요.
술이란 말에 설 씨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에미가 웃었다. 무알콜이라고 술이면서도 술이 아닌 음료니까 뱃속의 아이는 걱정 말아요.
그제야 설 씨는 환하게 웃었다. 역시 선계에는 없는 것이 없구려. 이 설 모의 걱정거리까지 해결해 주셨으니 진정 선경의 선녀답소이다.
쁘니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설 씨는 에미의 손까지 잡고 방방 뛰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 쁘니의 옆쪽에서는 장 씨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천하제일도 마누라에게 잡혀 사는 건 똑같군. 어쩐지 인생 운운 할 때부터 뭔가 짠한 느낌이 있더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