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산책, 그들의 작은 여행(8)

당신의 친절한 이웃, 센티멘탈 무림인

by 블랙스톤

모두를 놀라게 한 공격은 빠르고 치명적이었으나 설 씨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빠르지는 않았다. 설 씨가 손바닥을 뒤집자 장 씨가 내지른 보이지 않는 공격은 모두 사라졌다.

장 씨 또한 자신을 짓눌러오는 거대한 기운에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먼저 보호해야 했다.

기를 돌려 몸을 보호하면서도 장 씨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악을 쓰며 다시 큰 낫을 휘둘렀다.

장 씨가 큰 낫을 휘두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낫과는 상관없는 위치에서 튀어나오는 그 기운들은 일정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라졌다.

오른쪽 위로 휘두르는데 실제 기운은 왼쪽 위에서 튀어나오기도 했고 아예 장 씨와는 거리가 있는 곳에서 생성되어 튀어나오기도 하는 공격.

무서울 정도로 변칙적인 그 공격들은 그저 벽을 두드리듯 일정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장 씨는 멈추지 않았다.

쉬지 않고 낫을 휘두르는 그의 온몸에서는 조금씩 하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멈추세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설씨부인이 앞으로 나서 장 씨를 불렀으나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미친 듯이 낫을 휘둘렀다.

이미 그는 지금을 보고 있지 않는 듯했다. 부릅뜬 눈은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낫을 멈추지 않았다.


설씨부인은 설 씨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설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집은 손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그가 주먹을 쥐기 시작하자 장 씨를 짓누르던 기운이 그를 더 강하게 옥죄었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장 씨는 들리지 않는 큰 낫을 두 손으로 잡고 비명을 지르며 치켜세웠다. 그리고 다시 내려쳤다. 여전히 설 씨의 기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장 씨는 생명을 태워 올렸다.

그의 온몸에는 검붉은 핏줄이 돋아났고 그의 머리는 뿌리부터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장 씨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생명을 태운 공격을 시작하려 했다.

고개를 내저은 설 씨는 주먹을 콱 쥐고는 빠르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장 씨를 압박만 하던 기운이 그의 목 뒤와 명치를 강하게 가격했다.

장 씨는 눈을 부릅떴다. 마지막까지 비명을 지르며 낫을 들어 올리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애원처럼 들렸다.


“또, 이 아비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구나. 아가야.”


그가 선 상태로 혼절했음에도 한동안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백화곡의 여인들 중에는 입을 가리고 울고 있는 이들도 있었으며 방립을 쓴 사태를 매섭게 째려보는 이도 있었다.

설 씨가 나서서 장 씨를 천천히 바닥으로 뉘인 후에야 사람들은 움직일 수 있었다.


장 씨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설씨부인은 방립의 사내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을 건넸다.

사내는 입을 꾹 다문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과 조금 떨어진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부인은 장 씨를 살피는 사람들에게서 한걸음 떨어져 있는 설 씨에게 다가갔다.

설 씨는 부인이 다가오자 살짝 웃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부인을 바라보는 눈꼬리가 축 처져 있어서 기운 없는 처연한 웃음이 되고 말았다.


“급격한 운용을 하는 불안정한 내공이라 탈진을 유도하려 했는데 진원(眞元)을 상하면서까지 내지를 줄은 몰랐구려.

내 불찰이오. 복수의 불꽃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직접 겪어보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불꽃을 너무 하찮게 생각했소.

어느 정도 원기의 손실은 감수해야 할 듯하오. 다행이라면 그릇에 금이 간 것은 아니라 흔들린 정도에서 그쳤다는 것인데. 한동안은 일정 이상의 내공을 끌어올리긴 힘들겠지. 다만 이미 끌어 쓴 수명은….”


설씨부인은 말하고 있는 설 씨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설 씨는 마음이 복잡한 듯 한참이나 기절한 장 씨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는 뿌리부터 손가락 세 마디 정도 하얗게 세어버렸는데 그로 인해 일순간에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아낸 것인지가 느껴졌다. 강력한 내공으로 인해 팽팽했던 피부마저 약간 푸석해졌다.

장 씨가 그저 기절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뒤늦게 설 씨에 대해서 분노했다. 하지만 그의 엄청난 무공을 봤기에 아무도 달려들지는 못했다.

그저 설 씨의 등에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무언가를 다짐하고 있을 뿐이었다.


에미는 입을 가린 채 서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진 공방이나 온몸에 핏줄을 세우던 장 씨의 모습에 새삼 이곳이 ‘무림’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웃으며 이야기하다가도 돌아서며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무법지대. 아무리 법보다 가까운 것이 주먹이라지만 이곳은 ‘정당한 복수’라면 법마저도 피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이 하늘을 날고 바위를 가루로 만드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곳. 수백, 수천의 사람보다 한 사람이 더 강할 수도 있는 곳. 개인이 단체보다 강할 수 있기에 그 어떤 세상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곳.

그러한 자유가 어떠한 토대 위에 있는 것인지를 눈으로 직접 본 에미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막연히 생각하던 낭만 위에 세워진 공간이 아니었다.

무림은 복수를 위해 세월을 쌓아 올린 강자가 다른 강자에게 막혀 자신의 세월을 허비하고, 생명을 허비하며 쓰러져 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바라보는 곳이었다.

‘강자존(强者尊)’. 강자에게 법을 강요할 수 없는 공간. 이 무림의 무한한 자유는 어쩌면 그 강자만을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에미는 그런 무림이 새삼 무서워졌다. 냐아앙.


쁘니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에미의 볼따구니를 솜방망이 펀치로 후려쳤다. 한방이 아니라 서너 방을 연속으로 후려쳤다.

평소보다 묵직한 펀치를 눈두덩이에 얻어맞고 나서야 에미가 쁘니를 쳐다보았다. 냐앙.


하지만. 쁘니의 말에 반박하려던 에미는 묵직한 솜방망이 펀치를 몇 대 더 맞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에미가 입을 다물자 쁘니는 에미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냐아아앙.

그러면서 꼬리로 설씨부인을 가리켰다. 에미는 쁘니의 말을 듣고서야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 맞아. 나는 ‘마스터’를 대신해서 선물을 주러 온 사람이지.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바구’의 대표자는 지금 나니까, 알았어, 정신 차릴게. 이야기를 마저 들어야지.


혼잣말을 들은 것인지 설 씨를 다독이던 설씨부인이 천천히 에미에게 다가왔다.

쁘니의 솜방망이와 귓속말 덕에 정신을 차린 에미는 슬쩍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놈의 무림은 혼잣말도 잘 못하겠네. 귀가 밝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에미의 말에 설씨부인뿐 아니라 설 씨, 그리고 백화곡을 따라나선 추종자들 사이에도 작은 헛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에미는 과장되게 웃으며 이번에는 모두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휙휙 하더니 사람이 쓰러진 것도 놀라운데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뒷수습을 하는 게 더 이상해.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외눈박이로 살아야 하니까. 그건 그렇다고 치고.

오늘은 목적지에 도착한다기에 따뜻한 물로 좀 씻는 걸 기대했는데. 갈 수 있으려나.


에미의 너스레에 사람들은 긴 여행의 종착지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무림에서는 이런 싸움이 일상이라는 것도.

자신들은 두 고수의 싸움에 너무 놀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는 익숙한 행동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것은 ‘무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모두가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그 두 글자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부자연스럽고 부당한 일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

한 사람이 산을 뒤엎고 강을 가르는 힘을 가지는 곳이기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 그들은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놀랐다고 해도 다른 곳에서 온 에미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림’이기에 그들은 에미의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고 이 모든 현실에 피식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설씨부인은 에미에게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장 씨의 격렬한 반응에 일행에게 어떻게 이 일을 설명해야 하나 당황했는데 에미의 말 덕에 말문을 트는 것이 어렵지 않아 졌다.

그 감사의 인사를 받으며 에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에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쁘니는 에미의 머리 위에 올라서서 가슴을 부풀린 상태로 앉아 있었다.

신비한 고양이와 매일 투닥대는 신비한 소녀, 혹은 아가씨.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애어른.

그녀는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느끼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데도 그녀의 머리 위에 고양이는 미동도 없었다. 여전히 신기하고 예쁜 애어른이었다.


“당사자가 일어나기 전이지만 일단 궁금하니 우리는 뒷이야기를 들어요. 중간에 끊기는 건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도 하는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니까.

짧게 요약해서. 대신 우리가 납득할 만큼만 자세히. 이해가 되는 이야기라면, 그렇다면 오늘은 지붕이 있는 집에서 깨끗하게 씻고 따뜻하게 식사를 하고 싶어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 씨의 도움으로 이동하는 것에 힘듦은 줄었다지만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여자들이 많은 백화곡의 경우에는 노숙의 불편함이 더욱 심했다. 신비로운 힘을 가진 백화곡주가 먼저 나서서 사정을 듣고 판단하자는 이야기를 하자 모두가 그것이 옳다고 느꼈다.

천하제일이라는 설 씨가 나선다고 해도 백화곡주라면 뭔가 방법을 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빠른 수긍에 에미는 다시 한번 당황했지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설씨부인 덕에 속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오직 머리 위에 있던 쁘니만이 변화를 느끼고 어깨로 내려와 슬쩍 에미의 얼굴에 몸을 비볐다. 온기를 전해오는 쁘니에게 에미는 손을 올려 쓰다듬는 것으로 감사를 표했다.


장 씨가 깨어난 것은 사흘이 흐른 뒤였다. 장 씨는 작은 방 안에서 일어나자마자 낫을 찾았다. 무기가 보이지 않자 그는 양손에 진기를 잔뜩 두르고 심호흡을 하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방 밖에서 빈 그릇을 치우고 있던 한 여성과 마주하는 순간 진기가 역류하여 그대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릴 뻔했다. 장 씨와 마주친 여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서 있다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 아빠 일어났어!”

“일어났다고? 어디, 어디에!”


그리고 겨우 다스린 진기는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또 다른 여성을 보는 순간 다시 진탕 됐다. 흰머리와 주름이 늘기는 했지만 그건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자신의 부인이 맞았다.

장 씨는 지금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내부를 진탕 시키며 미친 듯이 날뛰는 내기 덕에 지금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여전히 그의 내부는 엉망이었기에 그 아픔에 우는 것인지 십수 년 만에 만난 가족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에 우는 것인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복수와 세월이라는 댐에 막아두었던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슬픔이 물밀 듯이 터져 나와 주체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장 씨는 그 눈물을, 슬픔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세월과 복수를 녹여버리는 그 거대한 물결을 막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장 씨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참이나 소처럼 울었다.


장 씨의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것은 아내의 잔소리와 등짝을 두드리는 손길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딸의 잔소리도 있었지만 어쨌든 가장 주가 되는 것은 아내의 핀잔이었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장 씨는 기꺼이 웃을 수 있었다. 그 오랜 세월을 복수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다는 것도, 재회의 순간이 구박으로 이어지는 것도 괜찮았다.

아니, 즐거웠다. 그리고 하늘에 감사했다. 아내와 딸이 다친 곳 없이 멀쩡하게 잘 살고 있었다는 것에. 뒤늦게 집으로 들어와 한쪽에 멀거니 서있는 외팔의 호위에게 감사했다.

한참이나 구박을 받던 장 씨가 호위에게 다가가 넙죽 절하자 호위는 당황했고 아내는 엎드린 장 씨의 등짝을 마구 두드리며 일어나라고 난리를 쳤다. 사위한테 장인이라는 사람이 뭐 하는 짓이야! 장 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전에는 내 세상이 아내와 딸이라는 걸 몰랐네. 사건 이후에나 알았지. 복수라는 허망한 이름에 매달린 것도, 저승에서 나를 원망할 아내와 딸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네.

내 세상은 그렇게나 작았어. 시간이 흘러도 그렇더군. 백화곡주를 만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도 내 세상은 넓어지지가 않았어.

오직 이 두 사람과 함께 하던 그 순간뿐이었어. 그런데 돌아왔네. 내 세상이. 세상을 돌려준 이가 사위든 어린 사람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고맙네. 고마워.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호위는 멋쩍게 웃었고 딸은 그런 아빠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내도 눈물을 훔치다가 다시 남편의 등을 후려쳤다. 아무리 고마워도 동네 사람들 부끄러우니 얼른 일어나라고 이 화상아!

장 씨는 너무 오랜만에 듣는 그 화상 소리마저도 정겨워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또 눈물을 흘렸다.


설씨부인은 마카롱을 좋아했다. 에미는 그녀가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많은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그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에 설씨부인은 행복해했다. 그리고 항상 후식으로 마카롱을 먹었다.

설씨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입안에서 단단한 구름이 녹는 기분이에요.


그거 기분만이 아닐걸요. 이빨 잘 닦으세요. 설씨부인은 그저 웃어넘겼지만 에미는 진심이었다.

미식가라던 설씨부인은 과연 표현력이 남달랐다. 심지어 창의력도 좋아서 같은 감탄사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혀에 닿는 맛이나 향만으로도 비슷한 재료가 들어간 음식들을 곧잘 추측해내곤 했다.

에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 천하제일 남편과 미식 천하제일 부인인가. 야옹. 옆에서 접시에 코를 박고 있던 쁘니가 거들었다.

여전히 접시에 코를 박은 상태였기에 에미가 말했다. 너는 다 먹고 말해. 보지도 않고 먹으면서 말하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장 씨가 집 밖으로 나오자 백화곡 사람들이 마을 공터로 모였다. 그곳에는 ‘은향곡(隱鄕谷)’의 촌장인 ‘사자권’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공을 잃고 은퇴했기에 사자권이었던 사람이지만.

그는 엄지와 검지만 남은 왼손으로 무사히 깨어난 장 씨를 소개했다.


"가족이 돌아왔습니다. 장씨부인이 그렇게나 찾고 기다리던 장 씨가 돌아왔어요.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만남을 마다하지 않아요.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가 어느 날 마음이 내키는 대로 떠나도 괜찮습니다. 오늘 하루는 맘껏 먹고 쉽니다. 새로운 친구들과 오래된 가족이 돌아온 즐거운 날이니까요."


사람들은 일단 논다는 것에 즐거워 소리를 질렀다. 은향곡의 주민도 그리고 백화곡의 손님도, 추종자들까지. 그들의 시선은 각기 사자권과 에미를 향해 있었다.

은향곡의 주민들은 촌장인 사자권의 선언에 즐거웠고 백화곡 인원들은 에미의 요리를 기대했다. 그들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더라도 축제는 은향곡에서 함께 즐길 예정이었다.


멋들어진 계곡을 찾아 은향곡이라 이름 지은 후 은거를 시작한 사자권과 의제들은 평생 무공만 팠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농사도, 음식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물에 육포를 넣어서 불려먹는 것이나 사냥을 해서 고기를 굽는 것뿐.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은거를 꼭 산골짜기에서 할 필요는 없으니 그냥 도시 나가서 살자고 할 때쯤 팔을 잃은 무사와 그가 지키는 두 여인을 만났다.


고향에서 살다가 사정이 생겨 떠나왔다는데 짐이 간소하고 발이 부르튼 것이 오래 걸은 티가 났다. 노모를 모시는 부부라고 소개한 호위무사의 곁에서 장 씨의 딸은 슬쩍 볼을 붉혔고 장 씨의 아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파악한 사자권은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어디선가 도망 왔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자신들은 무림에서 은퇴한 사람들이고 원한으로 따지자면 칼에 피를 묻히며 살아온 자신들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훨씬 많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장 씨의 아내는 장 씨처럼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근처에 사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사는 것처럼 살 수 있게 되었다. 사자권은 크게 만족했으며 그 의제들은 이러한 현상에 한 가지를 결심했다.

그들은 지인들 중 은퇴를 결심한 이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가를 이룬 이들은 가끔 한 번씩 들르는 정도였지만 오갈 데 없는 이들은 이 마을에 합류했다.

그렇게 마을이 커지고 오가던 여러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합류하자 더욱 살기가 편해졌다.

먹고사는 것에 문제가 없어지자 호위는 일 년에 한 번씩 사자권에게 고향을 다녀오겠다 인사를 했다. 사자권은 선선히 그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호위는 잔뜩 지쳐서 돌아오곤 했다.


설 씨가 정사대전(正邪大戰)을 끝내고 잔뜩 배가 불러진 설씨부인과 함께 이곳에 들렀을 때 장씨부인이 설 씨의 첫 아이를 받아주었다.

칼에 피는 묻혀봤어도 새로운 생명을 받아본 적은 없는 이들이 갑작스러운 진통에 대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장씨부인은 크게 호령해 무림 고수들을 부렸다.

내공을 잃은 사자권만이 오두막 밖에 서서 잔심부름을 피할 수 있었다. 내공으로 인해 기감이 발달한 설 씨와 사자권의 의제들은 오두막 안에서 느껴지는 괴로워하는 기척과 비명에 발을 동동 굴렀다.

내공을 잃은 사자권은 비명만 들려도 이렇게 힘든데 저걸 다 느끼고 있는 이놈들은 얼마나 힘들겠나 싶었다. 내공을 잃은 게 가장 다행인 순간이었다.


장씨부인은 아이를 받아본 일은 없었지만 직접 낳아보기도 했고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남편이 무림세가의 하인들을 다스리는 위치였다면 부인은 그 하인들의 아내를 이끌고 크고 작은 살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러 집의 안주인들을 이끄는 위치의 사람은 알기 싫어도 여러 정보를 접할 수밖에 없었다.

장씨부인은 요령 있게 산파일을 해냈다. 출산 이후 요양하는 것에도 정확한 정보를 전달했다. 무려 무림세가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실수가 생기면 칼부림이 나도 할 말이 없는 곳에서 평생을. 그녀는 허투루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을의 끝자락에 일정보다 일찍 태어난 아이 덕에 설 씨와 설씨부인은 그해겨울을 은향곡에서 함께 지냈다. 그리고 그 긴 겨울은 서로의 속내와 과거 이야기를 나눌 충분한 시간이었다.


장 씨가 추격자들을 유인하기 위해 떠나고 눈물을 흘리며 동굴로 돌아오던 부인과 딸은 추격자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마침 돌아온 호위 덕에 목숨은 건졌지만 동굴 안에서 일어난 소란과 피냄새에 동굴 안쪽에 살던 영물이 깨어나고 말았다. 그 이무기는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한 것에 분노했다.

호위는 영리하게 앞장서서 싸우다가 추격자들을 이무기에게 붙였다. 장씨부인과 딸은 호위의 신호에 계곡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

그들의 품 안에는 땔감으로 쓸만한 나뭇가지가 한아름 들려 있었는데 호위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들이 들키지 않고 내려갈 방법은 없었다.

때마침 이무기의 난동으로 신호체계에는 불이 붙은 상황이었다. 하여 다급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민가의 사람인 척 산을 걸어 내려갔다. 호위는 당장 몸을 뺄 수가 없었기에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다.


변수는 이무기가 너무 강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 상대가 되지 못했다. 호위도 세가의 인원들과 함께 전력으로 공격했으나 생채기를 낸 것이 다였다.

세가의 가주가 도착했으나 그 역시도 고전했고 그러는 와중에 위협을 느낀 이무기가 독무(毒霧)를 뿜어댔다.

호위는 몸에 밴 습관에 따라 가주에게 향하는 독무를 자신의 팔로 막아냈다. 그 사이 가주가 이무기의 목 안에 칼을 쑤셔 넣었다.


팔을 잃은 호위에게 가주는 큰 재물을 내렸지만 그를 위한 것은 그뿐이었다. 호위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정중하게 절을 올리고 떠나왔다. 다행히 치료는 제대로 해주었기에 몸을 가누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호위는 장씨부인과 딸을 호위해서 길을 떠났다. 자신의 고향이나 장씨부인의 고향은 불안했다. 혹시라도 흔적을 쫓아올지 모르니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야 했다.

그렇게 멀리멀리 목적지도 없이 걸었다. 추격자가 없다는 것을 확신할 때까지 그저 계속 떠돌아야만 했기에 사자권과 만나 머물게 된 은향곡은 이들에게도 새로운 고향이 되었다.


다시 한번 축제 음식을 하게 된 에미는 날아다니는 프라이팬과 웍을 소환했다. 이번에는 지가 알아서 공중에서 칼질하는 식칼과 도마까지 꺼내 들고서 엄청난 속도로 음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예 대놓고 제대로 해보기로 마음먹은 덕에 오븐과 가스레인지도 하늘을 날아올랐다. 천하제일이라던 설 씨와 은거한 모든 이들이 입을 떡 벌린 채로 그런 에미를 바라보았다.

에미는 신이 나서 요리를 하다가 중간중간에 보글거리는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다. 탁자에 누워 팔을 괴고서 그런 에미를 쳐다보던 쁘니는 중얼거렸다. 냐옹.


축제는 닷새나 이어졌다. 신난 에미가 계속 요리를 만들어댄 탓이었는데 이번에는 쁘니도 말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오는 요리와 술에 즐거워했다. 괜히 선경에서 왔다고 하는 게 아니구먼! 역시 선녀님!


백화곡 사람들은 에미를 칭찬하는 말에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에미가 신비한 힘을 발휘하고 사람들이 놀랄 때마다 자신들에게도 그 힘이 영향을 미치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산적에게 침탈당한 마을 주민이 아니라 정말 신비한 백화곡의 일원이 된 것만 같았다. 백화곡과 에미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다시 설 수 있는 힘을 주고 있었다.


축체가 이어지면서 은향곡 주민과, 백화곡, 그리고 추종자들까지 하나가 되어 어우러졌다.

젊은 나이에 세상에 환멸을 느껴 무림에서 은퇴한 이들은 백화곡의 신비한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세상이 지긋지긋할지언정 사랑은 질리지 않는 법이니까.

추종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은향곡의 주민도 있었다.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고 또한 사랑에 은퇴는 없는 법이니까.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더라도 오일 간의 어울림으로 그들은 서로가 해가 되지 않을 사람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무림에서 서로의 됨됨이를 알아볼 시간으로 오일이면 충분했다.

단 한순간의 판단만으로 생사를 오가는 무림에서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이들의 칼끝 같이 예리한 감각은 서로가 불편함을 끼칠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끊이지 않고 제공되는 맛있는 음식과 풍족한 술은 모두의 마음을 여유롭게 했다.

여유가 있으니 서로가 양보를 할 수도 있었다. 여유가 있으니 하나를 양보를 받으면 자신도 하나를 양보했다. 여유와 양보가 생기니 축제에 웃음이 끊길 일이 없었다.


칭찬을 받을수록 에미의 입꼬리는 하늘로 치솟았고 보글거리는 소리에 맞춰 추는 춤도 멈추지 않았다.

설씨부인은 마스터의 특제 칵테일을 마시고 눈물을 흘렸다. 여태껏 이런 맛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마스터의 솜씨를 한참이나 자랑하고 나서도 기분이 가라앉지 않은 에미가 커다란 술독에 ‘이바구’의 술을 담아주었다.

칵테일은 금방 변질될 수 있어 담아주지 못한다고 하자, 설씨부인은 순간이 가장 맛있는 음식도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 말조차 에미에겐 칭찬처럼 들렸는지 에미는 술독 한동이를 더 술로 채워주었다.

이번만큼은 쁘니도 솜방망이 펀치로 에미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에미는 펀치를 맞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쁘니는 말했다. 냥아아악! 에미는 말했다. 아 몰라. 그냥 혼나고 말지. 뭐!


축제가 길어지자 장 씨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논밭 근처에서 손을 잡고 걷는 딸과 호위를 보았다. 다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아서 다시 눈물이 났다.

장씨부인은 그런 장 씨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아이고. 내 남편이 젊어져서 좋다고 했더니, 젊어진 게 아니라 어려진 거네. 울보가 다 됐어.


장 씨는 눈물을 닦고 다른 집중할 것을 찾다가 개간된 논을 보았다. 무림에서 은퇴한 이들이 모인 곳이라 깊게 파긴 했는데 영 어설프게 보였다.

장 씨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리쳤다. 일곱 갈래로 갈라진 기운이 땅을 단번에 뒤집었다. 그래, 농사일은 이렇게 하는 거지. 그는 앞으로 걸으며 논밭을 제대로 뒤집었다.

파종을 제대로 하려면 일자로 깊게 파야지, 제대로 하는 놈이 하나도 없었네. 중얼거리는 장 씨는 누가 봐도 숙련된 농부였다.

익숙하게 땅을 뒤집고 나니 아련했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장 씨는 저 앞쪽 숲까지 슬슬 걸으며 그 넓은 땅을 다 개간해 버렸다.

한번 손을 휘두를 때마다 논밭이 생기는 것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던 장씨부인이 말했다.


“이거 소처럼 울 때부터 알아보긴 했는데. 내 남편이 어려진 게 아니라 소가 돼서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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