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치라는 한정된 자산을 사용하는 방법
박 차장이 바에 들어선 것은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술을 적당히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언제나 드는 충동. 그리고 그 익숙한 충동을 매번 거부하던 그가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눈에 밟히는 간판에 딱 한 잔만을 외치며 바의 문고리를 잡았다.
모든 술자리가 그렇듯이 한잔은 두 잔이 되었고 석 잔, 넉 잔이 되었을 때 박 차장은 앞에 놓인 카프레제를 집어 들며 벽에 바짝 붙어 손들고 서 있는 저 여자는 언제부터 서 있었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늘씬한 여자가 벽을 마주 보고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은 눈요기로는 좋을지 모르나 지금 있는 곳이 술집이기에 살짝 인지부조화를 가져다주었다. 여자의 머리 위에서 손을 들고 서 있는 고양이는 박 차장에게 더욱 큰 인지부조화를 주었다.
슬쩍 칵테일을 준비하는 마스터의 눈치를 보면서 뺨을 한 번 꼬집었다. 평소보다는 확실히 둔하지만 그래도 아프다. 술이 취하긴 했지만 헛것을 볼 정도는 아닌데. 꿈도 아니고.
들고 있던 카프레제를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옆에 놓인 칵테일을 홀짝였다.
얼른 마시고 취할 수 있는 소주나 폭탄주를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 칵테일은 은은한 향으로 시작해서 목 넘김 이후 느껴지는 뜨거운 알콜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회식날이었다. 분위기에 따라서 신날 수도, 가라앉을 수도 있는 날. 다행히 최근 부서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부하 직원들도 공짜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최근에 승진한 젊은 과장이 분위기를 주도했고 자신이나 부장, 그리고 나이 든 과장 하나가 첫 번째 자리 이후 바로 빠져준다는 걸 알기 때문이리라.
여기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뭔가 우스워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보기에 젊은 과장과 나이 든 과장 모두 젊게만 보이는데 사원들이 그 둘을 대하는 태도가 명확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 든 과장도 그렇게 어려워하는데 자신이나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부장은 얼마나 불편할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마스터가 새롭게 내주는 칵테일 잔에,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 되뇌며 남은 술을 마시고 새 잔을 받아 들었다.
새로운 안주로는 카나페가 나왔다. 안주를 서빙한 건 벽에 붙어서 손들고 서 있던 여자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일하고 있다면 미성년자는 아닐 테니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 풋풋한 소녀는 생긋 웃어주고 다시 벽으로 가서 손 들고 섰다. 그 덕에 박 차장은 살짝 웃으며 어지럽던 머릿속을 털어낼 수 있었다.
“사실 모르는 건 아닙니다. 부서 내의 평가나 부하 직원 사이에서의 평을 모를 순 없죠. 하지만 그 평이 인사고과에 바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을 뿐인 거죠.
이십 년에 가깝게 회사생활을 해왔습니다. 눈치가 아예 없다고 하면 그게 더 큰일이겠죠.
고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에서 처신만 잘하면 그 외에 부분에서 꼰대 소리를 좀 듣는 게 대수겠습니까.
회사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그 외의 것에서는 좀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능력 없는 꼰대라는 뒷이야기가 들리거나 그런 느낌으로 슬쩍 흘리는 부하 직원과 이야기할 때면 기분이 상하죠.
그럴 때면 뭔가를 보여주고 싶지만 금방 가라앉습니다. 꼰대라는 건 사실이거든요. 능력이 없다는 건 보기에 따라 다른 부분이지만 굳이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다 가라앉을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능력이 없다면 대기업에서 굳이 저를 지금까지 쓰지는 않겠죠.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우리가 하는 일이라는 틀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제가 쌓아온 경험은 없어지지 않으니까요.
물론 조금 당황스럽기는 합니다. 대리나 과장들이 정말 다재다능해졌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저 친구들이랑 경쟁하라고 하면 정말 힘들겠지만 다행히 이 친구들이 유능하기에 방향만 정확하게 잡아주고 욕만 먹어주면 성과를 낼 수 있으니까요.
아, 얼마 전에는 적당히 갑질을 할 일이 있었습니다. 나이 든 과장에게 일을 맡겼는데 아직 그 선을 잘 모르더라고요. 결국엔 제가 나서서 그쪽에도 이득을 좀 남겨주고 우리 쪽의 이득을 가져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예 안 볼 사이도 아닌데 감정까지는 건들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줬어요.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이라 감정이 아예 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적당히 체면을 차릴 정도는 이득을 남겨 줘야 한다고.
혹여 담당자가 잘리거나 바뀌면 새로 관계를 설정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테니까. 적당히 유능하고 적당히 무능한 사람과 일을 계속하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고.
나이 든 과장과 따라온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과장은 이해한 눈치였지만 대리는 생각이 다른 듯했죠. 모른 척했습니다. 굳이 모두의 생각이 같을 필요는 없는 거니까요.
다행히 나쁘게 생각한 건 아니었나 봐요. 다음날에 슬쩍 둘러보니 욕만 잘 먹어서 차장 자리에 올라온 사람은 아니더라 하는 이야기가 돌더군요.
탕비실에서 한참 웃었습니다. 그럼 전에는 ‘욕만 잘 먹어서 승진한 꼰대’였다는 거잖아요. 그나마 좋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라고 느꼈습니다.
괜히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얼른 털어내 버렸어요. 쫓아가서 싸울 것도 아닌데 굳이 불편한 마음을 품고 살 필요는 없으니까요.”
여기까지 말하고 박 차장은 카나페 하나를 집어 먹고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아무렴 어떠냐는 마음이 들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닐뿐더러 이번 한 번만 만나고 말 사람들이었다. 재미없는 자신의 삶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어디 흔하던가. 하다못해 아내도 자신의 삶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하긴 매일 비슷한 회사일이 나도 지겨운데 듣는 사람은 오죽할까.
벽을 마주 보며 손들고 벌서던 아가씨는 어느새 주방 쪽 테이블에 기대어 이쪽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듣고 있었고 마스터는 잔을 닦다가도 간간이 박 차장과 눈을 맞춰주었다. 중간중간에 고개를 끄덕이고 가벼운 추임새를 던져주기도 했다.
이 가게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건 바 한쪽 의자에 올라 뒤집어진 채로 자고 있는 저 고양이뿐이었다. 머리가 의자 밑으로 흘러내려 있는데도 균형이 잡혀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저 든든한 뱃살 덕이리라.
두서없이 내키는 대로 이야기를 하는데도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낯선 사람 앞에서 무장해제 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게다가 딱 봐도 사이비나 뭔가를 권유할 것 같은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박 차장은 내심 이런 결론에 흡족해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젊었을 땐 술자리를 참 좋아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최대한 자제해야 했죠. 게다가 나이가 들고 직급이 오르니 회사에서는 편하게 술을 먹을 자리가 줄어들더군요.
친구들과의 자리는 당연하게 거의 없어졌죠. 그 친구들은 뭐, 저와 다른 나이던가요.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살고 있기에 더욱 만나기가 힘들어진 겁니다.
이상할 정도로 ‘이바구’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혼자서 술을 마시는 건 그리 선호하는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혼자 술집에 온건 처음이죠. 그런데도 이상하게 저 간판을 보니까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지금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속마음을 이야기한 것이 얼마만인가 싶어요.
집에 돌아가면 아이 엄마는 절 반겨줍니다. 아이들도 가끔 문을 열고 인사해 줍니다. 화목한 집안이죠. 그럼에도 저는 혼자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 아내는 수줍은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살다 보니 당찬 여자가 됐지만 그것도 저는 나쁘지 않아요.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죠. 부족한 월급에도 살림살이를 잘 꾸려나가고 아이들도 구김살 없게 잘 키워주고 있으니까요.
그냥 가끔, 엄마만 찾는 아이들이나 아이들만 챙기는 아내를 볼 때면,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가끔 들 뿐입니다. 그것도 찰나라서 괜찮습니다. 이제 저는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니까요.
하아. 그래요. 그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제가 주인공이라 느끼지 않아요. 관심을 갈구할 나이는 아니죠.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요. 가끔은. 아주 가끔은. 쉰을 넘긴 이 나이에도 칭찬을 듣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잘했다. 잘하고 있다. 틀리지 않았다. 옳다. 최고다. 믿는다.
지금까지 문제가 없었으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지 않으니 분명히 잘하고 있는 걸 겁니다. 그런데도 불안하거든요. 문득 잘하고 있는지 틀리진 않았는지 불안합니다.
저 어린 자식 둘과 착해빠진 마누라에게 혹시나 잘못한 것은 없을지 불안합니다. 회사일이야 바로 피드백이 돌아오니 그동안의 인맥으로 분위기를 읽고 수정하면 된다지만 집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란 말은 아이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능숙하게 아빠의 불안감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아이들은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제가 불안해하면 금방 눈치채더라고요. 이 불안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의 눈치를 보게 돼요. 어쨌든 이제 제 인생의 주인공은 아이들이거든요. 아이들이 커서 독립하면 조금 달라지겠죠. 그리고 지금 제 삶의 주인공은 아이들이기에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최고의 조력자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매일 변하는 듯 변하지 않는 회사일도 따라가야 하고 아이와 아내에게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가끔 만나는 친구들은 서로 그 정도면 좋은 아빠라고 말해주곤 합니다. 그러면 조금 위안이 생기긴 합니다만 글쎄요, 그게 정말 아이들과 아내가 공감해 줄 만한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힘들죠. 힘듭니다.
그런데요. 집에 돌아가서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나면 괜찮아집니다.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때문에 정신없이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매일 정신없고 때때로 불안해하고 가끔 행복한 그것 덕에 사는 건가 봅니다. 어쩌면 아내도 이런 생각일까요? 그렇다면 아내에게 더 미안해지는군요.”
박 차장은 괜히 잔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처음 바에 들어올 때는 우울한 재즈풍이었던 노래가 이제는 잔잔한 스윙풍의 노래로 바뀐 상태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와 바람에 흩날릴 듯한 그 음악이 살랑이며 어깨를 토닥여주는 듯했다.
음악에 맞춰 바를 손가락으로 톡톡톡 하고 두드렸다. 소리에 깼는지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던 고양이가 아래로 쭉 기지개를 켜더니 휙 하고 바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내 식빵자세로 앉아 톡톡톡 소리에 맞춰 꼬리를 내저었다.
슬쩍 미소를 지으며 박 차장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톡톡톡. 자신의 손가락이 내는 소리가 스윙에 실려 바람처럼 바 안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무거운 마음을 내뱉어 가벼워진 마음도 그 바람에 휩쓸리는 듯했다.
아주 조금은 괜찮구나 싶었다. 아니, 좋다고 느꼈다. 이런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지금의 내 인생이 아주 좋다고, 그렇게 느꼈다.
눈을 감고 음악에 실려 가볍게 흐르는 이 순간이 흘러 닿는 곳은 결국 아이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하루, 함께 뛰던 그 순간, 앞서 걷는 아이의 뒤를 함께 바라보는 아내의 웃는 얼굴이었다.
먼저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으면 더 예쁜 그림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먼저 웃으며 말을 걸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먼저 내밀었다면 더 행복한 그림이 될 것이다.
아내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톡톡톡. 음악과 스윙의 바람은 멈추지 않았고 그것에 실린 기분 좋은 생각들도 멈추지 않았다. 너울너울. 가벼운 음악에 맞춰 급하지 않게 서서히. 행복한 순간이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행복에 젖어들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