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뎌진다는 그 한 발 물러섬에 익숙한 그대에게, 한 잔 더(1)
한 사내가 있었지. 사내는 항상 궁금했다네. 세상 모든 것이.
왕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없었네. 부와 명예,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 넘쳐나는 형제자매들까지.
왕의 아들이라고 하면 의례적으로 떠오르는 외로운 사람도 아니었네.
왕은 철두철미한 통치자였지만 왕관을 벗는 순간에는 아들 바보, 딸 바보였다네.
그야말로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아름다운 왕비는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네.
후궁의 자식이나 자신의 자식이나 모두 사랑해주었네. 사랑하는 왕의 아이들이었거든.
처음에는 후궁들도 적응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곧 이해했네. 아니, 이해할 수밖에 없거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
착하다 못해 바보처럼 약간의 손해는 다 감수하는 왕비는 그 마음씨만큼 아름다웠기에 왕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왕비를 사랑했거든.
왕이 정치적 계산 없이 결혼한 이는 오직 왕비뿐이었고 더 쉽게 말해 사랑이 충만한 가정에 끼어든 입장에서 안주인을 미워하는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부모가 그렇게 행동하는데 제 동생을 미워하는 티를 낼 수는 없으니 그 많은 형제자매들도 좋으나 싫으나 서로 어울려 지낼 수밖에 없었네.
왕은 왕자 시절에 몰래 수도로 놀러 나갔다가 어떤 영애를 보고 한눈에 반했지.
그게 왕비였고 왕은 들통날 때까지 자신의 신분을 속였네.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녀의 집안은 말이 귀족이지 ‘귀족 출신이었다.’라고 말해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였네.
첫 만남에 스치듯 나눈 대화에서 그녀는 ‘분수에 맞게’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고 왕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로 결심했네.
사실, 그때는 그냥 불장난이었을지도 몰라.
신분을 속이고 몰락 귀족이나 다름없는 그녀와 몰래 연애를 즐기려다 보니 시장통부터 뒷골목까지 누비게 되었지.
감히 눈을 마주 보는 이도 드물었던 왕에게 시장 상인과의 흥정이며 뒷골목 건달과의 눈싸움은 새로운 경험이었네.
그중에 그녀라는 경험은 왕의 모든 가치관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네.
현명한 왕이 될 거라 칭송받던 그는 ‘왕자’라는 배경을 떼어내자 그저 어리숙한 이가 되었어.
그녀는 그 어리숙한 이를 천천히 보듬었지.
그가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되도록 많은 것들을 보여주려 노력하였네.
그리고 그는 그 많은 것들 중 가장 빛나는 그녀를 선택했다네.
그녀와의 연애는 왕의 통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 그리고 자식들의 육아 방침에도.
그들은 왕이 되고 왕비가 되었음에도 아이들은 함께 뛰어놀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네.
왕의 자식들은 엄격한 왕실 교육을 받으면서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는 같은 정원에서 뛰어놀게 했지.
말 그대로 흙 파먹으며 뛰어놀 공간과 시간을 받은 것이야.
아이들은 정실과 첩실의 차이를 알면서도 함께 흙 파먹은 정을 잊기가 쉽지 않았지.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 신기한 왕실은 그야말로 사랑으로 충만했다네.
그야말로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완벽한 환경에서 자란 사내는 자신의 의사로 뭔가를 결정할 수 있을 때쯤 한 가지를 깨달았네.
자신은 너무나도 호기심이 강했고 자신의 배경은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최고의 환경이라는 걸.
처음 그의 호기심은 자연으로 향했네.
흙 파먹고 놀다가 가끔 입에 들어온 흙의 맛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네. 그래서 물었어.
“왜 흙 맛이 다 다르죠? 여기 꽃이 피는 곳과 풀이 많은 곳, 저기 모래가 많은 곳과 커다란 나무가 자라는 곳의 맛이 다 달라요. 무슨 이유인가요?”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사내는 생각날 때마다 같은 걸 물었지.
보다 못한 그의 시종장이 나서서 학자들에게 말을 전했네.
학자들조차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개중 자존심이 상한 학자 하나가 늙은 농부에게 찾아갔어.
늙은 농부는 자신의 경험에 반추하여 흙에 따라 작물이 자라는 속도가 다르고 그렇게 지력이 다한 흙과 비옥한 흙은 맛이 조금 다르다고 말해주었네.
학자는 무언가 깨달은 듯 한참이나 늙은 농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네.
비옥한 토지와 황무지와 지력이 다한 토지와 습기가 너무 많아 다 썩어버리는 대지에 관하여.
그리고 그 학자는 자신이 쓰고 있던 농서(農書)의 기틀을 다시 잡고 뼈대를 잡은 후 막내 왕자를 칭찬했지.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매우 흡족해했으며 이후부터 사내가 호기심을 가지는 것에 제약을 두지 말 것이며 얼마든지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명을 내렸다네.
이후로도 사내의 호기심은 다양했네.
물은 왜 계속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지,
신발에 가죽을 덧대면 왜 소리가 덜 나는지,
달과 별의 위치는 왜 변하지 않는지,
왜 하늘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지 등등.
처음에 가졌던 호기심이 풀려나간 방향 때문인지 사람들은 사내의 호기심에 관심을 가졌네.
그 때문에 희한한 일이 생겼지.
수력(水力)을 이용한 대장간,
바퀴의 개량과 흔들림을 잡는 용수철의 개념 확립,
별자리 확인을 통해 방위를 담당하는 별과 그를 통한 계절과 시기를 달력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하늘과 땅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사람이 타고 날 수 있는 날틀도 만들게 되었지.
저게 아직 성인조차 되지 못한 왕자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네.
물론 그 왕자의 관심에 신경 쓰라는 왕의 뜻이 있었기에 그 작은 생각에 학자들이 매달려 더 확장시켜 낸 것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네.
사내가 청년이 될 무렵 사람들은 생각했네.
막내 왕자가 왕이 된다면, 혹은 왕이 되지 못하면 더 큰일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사내, 막내 왕자는 한 번도 왕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
당연히 큰 형이 왕이 될 거라 믿었지.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렇게 말랑말랑하게 생각하지 않았네.
사내가 자라는 만큼 왕은 나이 들어가고 막내의 입지가 강해질수록 다른 왕자들마저 뭔가 다른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합리적인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지.
모든 왕자들에게 이런저런 기회가 주어지고 그중 재능을 찾아낸 이도 있고 그러지 못한 이도 생겼네.
그리고 재능을 보이는 이들의 곁에는 사람이 모였지.
왕은 맏아들을 후계자로 공표한 상태였지만 그것이 다른 왕자를 모두 죽이겠다는 뜻은 아니었네.
게다가 저리도 아들, 딸 바보에 화목한 가정을 이룬 왕라면, 그의 맏아들이라면 형제를 모두 죽이거나 하진 않을 거라 믿었지.
그것을 믿고 사람들은 거침없이 다른 왕자들의 편에 섰다네.
여기서부터 그 아름다운 동화는 조금씩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하네.
왕은 모름지기 가족이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 말해왔고 그것은 왕세자를 초조하게 했네.
초조해지니 조금씩 날카로워졌고 그런 형을 보는 동생들도 심기가 불편해졌다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막내에게 이제 그놈의 호기심 좀 그만 드러내라는 말을 했다네.
누가 봐도 가정의 화목을 해치는 건 막내였으니까.
일부는 막내가 왕위에 욕심을 내고 있다고도 느꼈다네.
사내, 막내 왕자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반대로 말해 배고파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 적이 없었지. 단 하나만 빼고. 그의 호기심. 그의 궁금증.
그것은 천형(天刑)과 같아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지.
하늘이 내린 형벌을 참거나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걸 누가 천형이라고 하겠나.
궁금함을 드러낼 수 없으니 혼자서 끙끙 앓으며 책을 뒤지고 찾아보았네.
하지만 말했듯이 그는 왕자였네.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
몇 마디 말이면 해결되던 궁금증들이 몇 날 며칠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자 답답해지기 시작했네.
화가 났지.
그저 궁금한 것들을 궁금해하는 것이 무슨 문제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네.
그는 왕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했네. 왕은 빙그레 웃으며 걱정 말라고 말했지.
그리고 모두 네 뜻대로 될 것이라고 말했네.
왕은 막내에게 학술원에 보내 줄 것을 약속하며 나중에는 학술원장 자리를 내주겠다 했네.
그러면 그 모든 호기심을 학자들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사내는 만족하며 돌아섰다네.
그리고 왕세자에게 충성하던 시종 하나가 그 이야기를 들었네.
‘모두 네 뜻대로 될 것이다.’라는 말을.
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졌네. 급한 대로 왕세자가 왕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
왕실은 슬픔에 잠겼고 왕비는 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지.
삼일 만에 깨어난 왕은 왕세자와 독대를 했고 돌아온 왕세자는 측근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형제들에게 줄 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네.
막내에게는 학술원으로의 자리가 준비되었지.
그날 저녁 왕세자의 꾀주머니 중 하나인 백작이 막내 왕자를 찾아왔네. 그는 경고를 남겼어.
“그저 호기심이라는 것을 저는 아옵니다.
하지만 그 호기심이 다른 이들의 궁금증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도 사실이지요.
저하께는 그것이 그저 호기심일지 모르지만 바라보는 이들은 그것을 비범한 왕의 씨앗이라 느끼고 있사옵니다.
폐하가 건재하시고 그분이 세운 왕세자 전하가 있음에도 그러했지요.
지금에 와서는 어떠합니까.
폐하와 왕세자 전하께서 독대하시어 학술원에 왕자 저하의 자리가 마련되었음에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부만 하던 허약한 이들이 학술원에서 쓰러졌던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왕자 저하께서도 그리 되지 않는다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흘러 다니는 이야기들이 그저 그냥 떠다니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분명한 것은 왕세자 전하마저도 그런 이야기에 고개를 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네의 말을 믿을 수 없네. 형님께 가서 이야기를 해보겠네.”
“지금의 제 답변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제 목을 걸고 왕자 저하께 진언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 호기심, 절대 드러내지 마십시오.
모든 것에 의욕을 잃은 듯이 사셔야 하옵니다.
그리하여 모두의 관심이 거둬진 이후에야 혼자서 조금씩 궁금한 것들을 찾아보시옵소서.
주변의 모두를 물리고 철저히 혼자가 돼셔야 하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죽어도 그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시겠다면, 그저 불행해지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홀로 우뚝 서지 못하는 이상, 그 호기심은 오직 왕자 저하의 목을 조를 뿐입니다.”
그 경고는 허투루 들을 일이 아니었지.
막내 왕자의 접견 신청을 왕세자는 거절했고 하루가 지나 이틀이 되어도 언제 만날 수 있는지 답변조차 돌아오지 않았네.
왕은 다시 정신을 잃고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으며 그런 왕의 소식을 들은 왕비조차 쓰러져 간호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
깊은 밤 홀로 고민하던 사내는 인정해야 했지. 백작의 말이 맞다고.
전부터 형, 누나들은 사내에게 호기심을 죽이라 말해왔기에 의논조차 할 수 없이 그저 혼자 끙끙 앓았지.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좀처럼 백작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네.
“혹여나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시겠다면, 죽어도 그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시겠다면, 더 앞으로 나서셔야 합니다.
버리지 못한다면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정도의 성과를 내셔야 합니다.
바로 눈앞에 내보일 수 있는 대단한 성과로 스스로의 위치를 공고하게 만드셔야 합니다.
그러면 평생 저하의 호기심을 풀어드리기 위해 모두가 움직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말끝을 흐리는 백작의 눈이 묘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사내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죽어도 놓지 못하겠는 그 호기심, 항상 풍족했던 그는 오직 호기심에서만 굶주림을 느꼈고 잠깐 느꼈던 정신적인 기아(飢餓)는 그를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 조르는 아이로 만들었지.
그 기아를 느껴본 사내는 단 한순간도 그것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네.
오직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되어 자신이 지금 앞으로 나서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지.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네.
그것이 가지는 다른 의미가 자꾸 떠올랐기에 의도적으로 생각을 피하려 했고, 잊으려 했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일종의 포기와 같았네.
그는 호기심을 위해 저울의 반대편에 올라올 것들을 포기한 게야.
그렇게 시선을 돌려버린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