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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픔에 익숙해지면(2)

- 무뎌진다는 그 한 발 물러섬에 익숙한 그대에게, 한 잔 더(2)

by 블랙스톤

백작이 말하고 간 ‘홀로 우뚝 서는 것’의 의미를 모를 수는 없었지.

이제 갓 청년이 되었지만 왕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가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가.

그럼에도 사내는 그 말이 가지는 위험성을 애써 무시했네. 아니, 애초에 백작이 하고 간 모든 말이 너무 허황되다고 느꼈어.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어 몇 년이나 후계자 교육을 받았고 국정에 참여한 경험도 있는 큰 형과 달리 자신은 보여준 것이 거의 없는데 어찌 홀로 우뚝 서겠는가.

하지만 백작이 내뱉은 위협은 현실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네.

접견 허락 여부조차 알려주지 않는 큰 형의 모습은 명백히 자신을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지.

학술원으로 가서 평생 호기심을 충족하며 살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대만족이지만 형의 꾀주머니인 백작이 찾아와 경고 혹은 조언을 할 정도라는 건 문제였네.

이건 명백하게 형이 자신을 걸림돌로 생각한다는 것이니까. 형이 아니더라도 형의 측근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느꼈지.


백작의 말대로 선택지가 단 하나뿐인 것은 아니었다네.

가장 좋은 선택지는 큰 형을 만나 진심을 전하는 것이지만 그건 이미 글렀고, 그렇다면 이제 다른 형, 누나들을 만나 진심을 토로하는 수가 있었네.

진심으로 말하고 그들의 배경을 빌려올 수 있다면 큰 형도 자신을 곱게 학술원에 처박는 수밖에 없을 테지.

다만 그렇게 될 경우에 형이 더욱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이었네.


하지만 만약 백작이 말하는 것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백작이 말했던 ‘평생 궁금했던 것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두’를 얻을 수 있게 되겠지.

크게 바라는 것이 없던 사내에게 갈증을 느끼게 했던 그것을 평생 손쉽게 얻을 기회가 눈앞에 보인 거네.

그렇기에 사내는 ‘직접 형에게 찾아가 오해를 푼다.’라는 선택지를 외면했네.


그는 홀로 그 갈증을 풀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것에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에 답답함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달려갔던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지.

이미 손쉽게 그 갈증을 풀어냈던 경험이 있었기에 절대 혼자 노력을 통해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세.

어쩌면 그것은 백작이 노리던 외통수였을지도 몰라.


사내는 결심했네.

다른 이들은 신경 쓰지 않기로. 오직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고 사내가 태어나 최초로 한 ‘포기’였네.

그렇게 큰 형과의 관계를 포기하자 그다음부터는 아주 쉬웠네.

사내가 지키려 했던 것 중 소중한 몇 가지를 남기고 나머지에 대해서 더 쉽게 ‘포기’할 수 있게 되었네.


사내는 첫 번째 ‘포기’를 하는 순간에 그것과 관련된 많은 것을 놓아버린 셈이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엔 알지 못했다네.

사내는 백작의 경고와 형의 대응으로 인해 지금이 절체절명의 순간이라 인식했고 백작이 말한 ‘평생 궁금했던 것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두’에 홀려 ‘홀로 우뚝 서는 것’을 해야만 한다고 느꼈거든.


백작의 경고와 달콤한 말에 넘어가 그가 전한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거지.

형과 독대를 할 수 없다면 시종을 통해 말을 전하거나 글을 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형을 적으로 규정하고 얻을 수 있는 과실에 눈이 멀어버린 사내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모두 지워버렸네.


그 이면에는 어쩌면 그동안 쌓아온 우애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지도 몰라.

형이 마지막 선을 넘어 진짜로 나를 해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유폐 정도에서 멈출 거라는 이상한 낙관.

애초에 고민을 시작한 것이 형이 자신을 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의심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무시해 버린 이상한 결론.

입에서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 달콤하고 커다래 보이는, 성공 시 얻을 수 있는 과실에 눈이 멀어버린 사내는 모두 자신이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상상하기 시작했네.


사람이 한 가지에 맹신을 가지게 되면 다른 부분의 시야는 흐릿해지기 마련이지.

사내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형의 최측근인 백작이 이런 순간에 굳이 자신에게 와서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느꼈다네.

가만히 있어도 왕이 될 큰 형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이였으니까.

단순한 호의만으로 자신에게 경고와 조언을 건넬 리 없다는 걸 평소의 사내라면 바로 알아차렸겠지만 안타깝게도 사내는 백작의 말에 단단히 홀려버렸네.


사내는 침대 아래에서 가방 하나를 꺼냈어.

그 가방 안에는 아이가 하기엔 조금 위험한 상상과 궁금증들이 모여 있었지.

형에게 미움받기 싫은 막내의 조금 무서운 상상들.


아이의 발상에 반한 학자와 대장장이 몇몇은 그의 상상을 자신들이 현실로 불러내는 것 자체를 즐거워했네.

아이의 발상에 자신들의 상상을 덧붙이는 것에도 기쁨을 느꼈어.

하여 어른의 이유가 붙은 상상들은 ‘무기’라는 형태로 발전하곤 했다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사내에게 바쳤네.

사내의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니 사내가 관리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들은 그저 사내의 발상과 상상에 함께 한다는 것 자체를 즐거워했기에 앞으로 함께 하자는 의사표시였다네.


사내는 기꺼이 그것들을 받아들였네. 그리고 그것을 모아 봉인하면서 말했지.

이상한 소문이 잠잠해지고 다시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되면 이건 다 자네들의 공이 될 거라고.

사내를 따르는 집단은 감격했어.

상상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포상인데 자신들의 이름도 그 발명품들 옆에 나란히 서게 될 것이라니.

그들은 언젠가 어른의 이유가 붙은 상상들이 풀려 나오는 날, 자신들의 진면목을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 느꼈네.

그리고 그때 변화할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잠깐의 기다림마저 즐기기로 했지.

다만 그들도 아마, 이런 식으로 그들의 이름이 나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야.


사내는 자신을 따르는 학자와 대장장이를 불러들였네. 그들의 가족까지도.

그리고 자신의 별궁을 폐쇄했네.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누구도 나서지 못하게 했지.


며칠 후 별궁을 나선 대장장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장을 합치기 시작했네.

그리고 대량의 일꾼들을 고용했지. 궁전은 당연히 발칵 뒤집혔네.

조용하던 막내 왕자의 궁에서 사람을 모으고 있었으니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고 사내의 수력 대장간에서는 질 좋은 무기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네.

첫날에는 수십 개, 이후에는 수백 개가 되었는데 매일 그 수량이 증가했어.

도저히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낸다고는 믿을 수 없는 물량이 매일 쏟아져 나오는데 그 품질마저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심혈을 기울인 듯했지.


제일 먼저 기겁한 것은 군부였네.

사내의 대장간에서 쏟아져 나오는 검은 쇠를 두부처럼 가르는 명검이었고 그곳에서 나온 갑옷은 현재의 활과 화살로 관통할 수가 없었네.

그런 명품이 하루에도 수백 개씩 쏟아져 나오니 아무리 나이가 든 장군이라도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중 일부가 막내 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명품 무기를 받을 수 있었네.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네.

쟤는 나를 못 찌르는데 나는 쟤를 찌를 수 있다? 이런 걸 포기하는 군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나.

그리고 그들의 보호 아래 대장간은 규모를 늘려 갔고 막내 왕자의 별궁에 머무르던 학자들이 더 커진 대장간에 합류했네.


이후에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자들은 상인이었어.

그들은 그 상품가치를 정확하게 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지.

쇠를 가르는 명검과 화살이 관통하지 못하는 갑옷이라니, 그 풍기는 돈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네.

그들은 돈을 싸들고 막내 왕자의 별궁으로 찾아갔지만 접견을 거부당했네.

거기서 포기하면 상인이 아니지.

상인들은 대장간으로 달려갔고 학자들을 만나 돈을 마구 뿌려댔네.

학자들의 도움으로 상인들은 질이 조금 떨어지는 무기를 유통할 수 있게 되었네.

질이 조금 떨어진다고는 해도 군부에 납품되는 무기보다 조금 질이 떨어진다는 거지 시중에서 팔리는 물건들은 전부 고철 취급을 받을 만한 상등급의 상품들이었지.


그리고 며칠 후 대장간에서는 커다란 열기구가 하늘에 떠올랐네.

사람들은 연이나 종이를 새처럼 접어 날리긴 했어도 사람을 태우는 크기의 열기구에 대해서는 처음 보는 것이라 모두 충격을 받았네.

열기구는 조금씩 이동하며 수도를 순회했고 단 하루 만에 완벽한 지도를 군부에 제공했네.

군부는 만족했고 그 효용성에 집중했지.


이번에는 국경을 지키던 군부의 부대들이 발칵 뒤집혔네.

당장이라도 그 열기구를 자신들에게 보내줄 것을 요구했지.

망루에 올라 경계를 하는 이유가 적을 먼저 발견하기 위함인데 적의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먼저 조망(眺望)할 수 있는 기구라니 눈이 돌아가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지.


겨우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이런 일이 벌어지자 왕실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어.

하지만 그들이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대장간에서 개량된 농사 기구들이 쏟아져 나왔네.

심지어 가격도 아주 저렴했지.

무기 판매를 허락받으려는 상인들이 개량된 수레에 개량된 농기구를 싣고 나와 헐값에 판매하기 시작했네.

당연히 학자들의 지시를 따른 거였네.


막내 왕자의 대장간에서 나온 농기구들은 더 단단하고 효율이 좋았으며 그 수레마저도 더 많은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고 힘도 덜 들었지.

그런 상품이 막내 왕자의 손이 닿은 상인들을 통해서만 판매가 되니 상인들은 돈을 싸들고 막내 왕자에게 달려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어.

백성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네.

좋은 상품을 싸게 준다고 하니 개량된 농기구를 들고 막내 왕자의 덕을 칭송했네.

그 천재 왕자의 지성을 축복하고 이 나라의 보물인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네.


농사를 짓는 백성, 나라를 지키는 군인, 돈을 쥐고 있는 상인까지 단숨에 포섭되자 막내 왕자의 위치는 특별해졌네.

이제는 아무도 그의 처우를 함부로 정할 수 없게 되었어.


왕세자는 고민했네. 그리고 막내 동생을 불러들였지.

형의 초대를 받은 막내 왕자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형이 권한 차를 마시고 가벼운 다과를 먹었네.

그리고 별궁으로 돌아와서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쓰러졌어.

왕이 쓰러질 때와 같은 증상이었고 그것을 목격한 시종들이 놀라서 소란을 피우며 어의를 찾았네.


그리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수도의 많은 이들이 이 소식을 들었네.

천재가 쓰러진 것에 안타까워하고 왕과 같은 증상으로 쓰러진 것에 의아해했으며 왕도, 막내 왕자도 왕세자와의 자리 이후 쓰러졌다는 것에 분노했네.


막내 왕자가 깨어나는 데에는 삼일이 걸렸고 이상할 정도로 빠른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는 데에는 삼일이 걸리지 않았네.

그 삼일 동안 온 나라는 들끓었고 세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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