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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픔에 익숙해지면(3)

- 무뎌진다는 그 한 발 물러섬에 익숙한 그대에게, 한 잔 더(3)

by 블랙스톤

왕실의 친척들이 나서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네.

아직 왕이 살아있기에, 게다가 직접 임명한 왕세자가 있기에, 심지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독대를 하고 신뢰를 표시했기에 그들이 나설 수 있는 자리는 전혀 없었지.

하지만 현명한 왕과 백성의 사랑을 받는 막내 왕자가 같은 방식으로 쓰러지자 원인을 밝혀내겠다는 이유로 전면적으로 이 상황에 끼어들 수 있게 되었네.

그들은 공정한 조사를 약속하고 지금의 상황을 관망하던 귀족들을 끌어들였지.


왕세자는 반발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모함이라고 주장했지만 모두가 시큰둥했지.

그가 결백한지 결백하지 않은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네.

권좌를 물려받을 왕세자의 위엄이 손상되었다는 것이 중요했어.

오직 왕세자만이 저 권좌에 앉을 자격이 있었을 때는 누구도 그를 거역할 수 없었지만 왕을 시해하려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그의 위엄에 큰 상처를 주었네.

이제는 ‘권좌를 물려받지 못한’ 왕세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지.

의혹이 커진다면 권좌는 다른 왕자의 것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귀족들은 신중하면서도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네.

혹은 이것이 오히려 기회다 싶어 왕세자에게 접근하는 이도 있었지.


각자의 계산이 바쁜 와중에 왕세자는 여러 방향으로 움직였네.

그의 어머니는 쓰러진 왕비를 대신해 궁성을 단속했고 외가를 통해 귀족들을 포섭하려 했네.

왕실 상단을 통해 상계에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고 막내 왕자의 대장간에 재료를 대는 상단을 압박했지.

국정을 주관하며 정당한 후계자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지.

하지만 왕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은 워낙에 큰 문제였기에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네.

그것은 왕세자와 막내 왕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군부가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이기도 했지.


막내 왕자가 깨어난 것은 그 무렵이었네.

모두의 시선이 쏠렸지. 억울함을 토로하던 왕세자마저도 막내 왕자궁에 촉각을 곤두세웠어.

우습게도 막내 왕자는 일어나자마자 형님을 믿는다고 말했네.

가족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느냐며. 그리고 집안의 어른들도 믿는다고 했지.

조사단의 조사는 더욱 힘을 받았네. 왕세자조차도 거부할 수가 없었지.

형을 믿는 것은 ‘가족’이기에 믿는 것이고 집안의 어른들도 ‘가족’이기에 믿는 것이라는데 무슨 이유로 거부를 하겠나.

조사는 빠르게 이루어졌고 왕세자궁으로 약재들이 들어간 흐름이 확인되었지.

더 직접적인 원흉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왕세자궁을 뒤져야 하는 상황이 왔네.

왕세자가 아무리 억울함을 외쳐도 그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이제 없었지.


그리고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고 많은 이들이 여기는 순간 은밀하게 백작이 막내 왕자를 찾아왔네.


막내 왕자는 모든 이들을 물리고 그를 독대했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선 백작은 방 안에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고개를 숙이고 공손한 자세를 취했네.

그 표정 또한 한없이 부드러워졌지. 곧 그들의 대화가 시작됐네.

그걸 대화하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몰랐다고 하지는 않겠지.”

“이제 곧 원하는 것을 얻으시겠군요.”

“백작은 뭘 원하는 거지?”

“저는 그저 왕자님께서 원하는 것을 얻으셨으면 합니다.”

“백작은 권력을 얻겠군.”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네. 하지만 대답하지 않음으로 상대에게 확신을 주는 순간이 있지.

사내는 아무런 동요 없이 그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백작의 모습에서 확신을 가졌네.

아주 조금 백작의 내면을 본 느낌이었지. 사내는 생각했네.

이 사람은 나와는 보는 것이 전혀 다르구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구나.

백작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지.


사내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부족한 것이 없었어.

가족의 사랑, 부, 명예, 시간, 그 모든 것들을 태어남과 동시에 거머쥐었지.

하지만 반대로 그는 부족함이 없었기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지식과 현상에 대해 부족함을 느꼈지.

부족함이 없었기에 그는 부족함이 느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네.


그런 그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지.

권력도 아니고, 자신이 쌓아 올리는 지식도 아니고, 원초적인 힘도 아닌,

그저 순간적인 지식, 현상의 이유를 아는 것에 다른 것들을 희생할 정도 집착하다니.


하지만 사내에게 다른 것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당연한 것들에 불과했어.

원래 가지고 있었기에 얼마든지 교환패로 사용할 수 있는.

사내는 왕자이기에 태어난 순간부터 말 한마디로 지성도, 무력도 언제나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었네.

누군가는 그것을 빌려 쓰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지만 왕자는 단 한 번도 그것이 '부탁'하여 빌려 쓰는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

아버지가 왕이기에 가질 수 있는 태초부터 주어진 힘.

왕자가 '왕의 측근'으로, 혹은 이후에 '왕'이 될 가능성을 가지기에 부여받은 근본적인 힘이라 생각했네.

그 힘을 이용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또 자신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라 생각했네.

그것이 암묵적인 원초적 거래를 통해 획득한 왕자의 힘이었지. 그렇기에 사내는 크게 노력할 필요가 없었네. 노력과 책임 없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이라니 얼마나 근사한가?


이미 가진 것을 제외한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순간은 사내에게 기쁨을 주었고 그것들이 많아질수록 새로운 것이 다른 새로운 것을 불러왔지.

가지지 못했던 것에 궁금증을 가지는 것만으로 새로운 것들이 부풀어 오르 것은 사내에게 묘한 기쁨을 불러일으켰네.

그 순간이 주는 기쁨을, 결핍을 발견하고 그것은 메우는 순간의 기쁨을, 그저 생각을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 감탄과 칭송받는 그 순간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네.


청년이 될 때까지 사내는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느꼈지.

하지만 눈앞에 웃고 있는 백작을 보며 그가 자신과 비슷한 ‘동류(同類)’라고 느꼈네.


목적이나 방향은 다르지만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자.

중년의 백작은 갓 청년이 된 사내보다도 더 집요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탐해왔을 터였어.


이제야 원하는 것을 위해 조금씩 ‘포기’를 하게 된 사내와는 다르게 그는 이미 목적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네.

사내는 어렴풋이 백작이 왕국을 뒤흔들기 위해 자신이라는 패를 선택했음을 알았네.

하지만 이토록 노골적이라니.

사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거나 사내의 영향력을 압박하고 축소해서 백작의 영향력을 올리는 방향도 있을 터인데.

게다가 굳이 찾아와 보이는 여유로운 모습에 사내는 백작의 목표가 단순한 ‘권력’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지.


“저는 귀족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귀족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죠. 저는 이 자리에 만족합니다.

가진 것도 많고 적당히 책임감도 있으며 또 대부분의 어려운 결정은 위로 미룰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자리에 맞게 행동해 왔습니다. 그걸 다른 이들은 권력욕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책임감이라고 말하지만요.”


사내는 슬쩍 말을 끊고 숨을 고르는 백작에게 의자를 권했네. 백작은 한 번의 사양도 없이 슬쩍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의자로 가서 앉았어.

아무런 겸양(謙讓)도 없이, 아주 가벼운 목례로 감사함을 표시했음에도 사내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지.

막내 왕자의 그런 태도에 백작은 다시 한번 활짝 웃어 보였어.

그리고 조금 느슨하게 의자에 기댔네.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이와 이야기하듯, 친한 이와 이야기하듯, 편한 이와 이야기하듯,

그렇게 백작은 조금 편안한 목소리로 왕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네.

그래. 이야기. 대화가 아니라 독백을 하듯이 조용하게.


“어린 시절 처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제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조금 더 멀리 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세상의 모든 일은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더군요.

몇 권의 책을 읽고 나니 대충 사람들의 심리가 보였습니다.

몇 십 권의 책을 읽고 나니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몰아넣으면 반발하듯 원하는 반응이 튀어나오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몇 백 권의 책을 읽고 나니 사람이 모인 단체라는 것도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더군요.

더 많은 책을 읽고 나서 저는 용돈을 가지고 몇몇 사람을 사서 단체 몇 개를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단체들을 가장 크고 단단하게 키워보았죠. 크게 어려운 것은 없었습니다.

가장 강한 자를 공통의 적으로 만들고 모두를 부추긴 후에 그 부산물을 삼키는 것.

아, 충동질하는 것을 들키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지만 경험이 쌓이니 그것도 쉬워지더군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면 모두는 원하는 것을 위해 투쟁하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성인이 되고 나니 모든 것이 허탈해졌습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저는 아버지의 영지에서 원하는 것을 다 해봤거든요.

이미 가문은 저라는 후계가 확고했고 아버지는 스스로의 손으로 제 형제들을 모두 처리해 주었습니다.

물론 제가 약간 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리긴 했지만요.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더군요. 저보다 높은 이라 해도 큰 차이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겁니다. 사람이 모이고 모여서 가장 크게 만들어진 단체인 '국가(國家)'라는 것이요.

저는 이제 그걸 가지고 놀고 싶어 졌습니다. 아니,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번영하는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저는 제 울타리 안의 가축들이 모두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르길 바랍니다.

그들 하나하나를 돌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후에 기록될 모든 영광에서 제 이름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게 되겠지요.

사실 남들이 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 업적을 모두가 알게 되고 역사를 통해 후손들까지 칭송하게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더군요.

그러기 위해서는 왕자님이 필요했습니다. 저처럼 뭔가 특별한 것을 보는 왕자님의 그 안목이 필요했죠.

왕자님을 학술원으로 향하게 하여 쌓아 올린 성과를 취하는 것도 좋겠지만 저는 왕자님이 온 힘을 다하면 격이 다른 것들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왕자님은 그 짧은 시간만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마구 뽑아내고 계시죠.


저는 왕자님에게 무한한 새로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저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왕자님은 그 '호기심'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는 분이죠.

그것은 제가 '사람을 운영하는 것'에서 눈을 돌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가장 강렬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죠.

그렇기에 저는 왕자님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으며 왕자님 역시 저를 오해하지 않고 오롯하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르지만 같으니까요."


백작은 긴 독백을 마치고 한참이나 말없이 차를 마셨네.

그리고 왕자의 답을 듣지도 않고 일어나서 왕에게나 올리는 예를 갖추고는 천천히 물러났네.

사내는 그런 백작을 만류하지 않았어. 그 예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지.

사내는 백작만이 온전하게 자신을 알아봐 주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사내를 위한 말이라 느꼈지.

단 한 번만 들었음에도 그의 긴 이야기가 뇌리에 선명하게 박힌 느낌이었네.

사내는 자신도 백작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 둘은 암묵적으로 왕과 신하로 서로를 인정한 거였네.

하지만 사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네.

가족을 '포기'해서 '호기심'을 채울 방법을 찾은 사내와 아버지를 '이용'해 형제를 모두 처리한 백작이 과연 같은 꿈을 꾸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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