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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픔에 익숙해지면(4)

- 무뎌진다는 그 한 발 물러섬에 익숙한 그대에게, 한 잔 더(4)

by 블랙스톤

동화는 이제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어. 막내 왕자는 백작과 만난 이후 왕세자에게는 죄가 없다고 천명했네.

막내 왕자궁의 공식적인 발표에 가장 당황한 것은 조사단이었고 이후에는 왕세자궁이었지. 그 발표로 사람들은 이제 왕세자를 측은하게 보기 시작했네.

잘난 동생에게 질투를 하는 못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거지.


왕세자가 하는 이야기에는 어떤 권위조차 없었네. 그저 못난 형이 동생을 핍박하다가 현장을 들킨 것처럼, 그 현장을 어떻게든 거짓말로 빠져나가려 하는 것처럼 취급받았지.

다른 왕자들마저 이 사태에 묻혀버렸지. 왕세자가 왕이 되지 못하면 다른 왕자들이 아니라 막내 왕자가 왕이 되어야 하는 것만 같은 분위기가 형성이 되었네.


백성들의 지지와는 상관없이 귀족들은 그들만의 사정이 있었지.

묘하게 어긋나는 왕세자궁의 분위기와 은근히 막내 왕자를 지지하는 듯한 군부의 행동.

사태에 편승해 튀어나온 왕족들의 위상이 끝없이 올라가고 있음에도 어떠한 견제도 하지 않는 막내 왕자의 모습에서 괜히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되었네. 뭔가 돌아가는 판이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거지.

모든 것들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착착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막내 왕자가 왕이 되기라도 한다면 트집 잡힐 일은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귀족들은 막내 왕자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귀족들이 대거 포함된 조사단 역시 그런 흐름을 따라가게 되었지. 백성의 지지, 군부의 중립 선언, 조사단의 간 보기가 합쳐지니 자연스럽게 나라의 대부분이 막내 왕자의 눈치를 보게 되었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막내 왕자는 그저 대장장이들과 학자들의 서류를 검토하고 그들과 이야기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네.

가족을 포기해서 가지게 된 이 순간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네.

그런 그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모든 이들에게 알려졌고 많은 이들이 그런 막내 왕자의 평정심에 감탄을 보냈네.

막내 왕자가 빵을 먹으며 농부와 밀의 경작 상황에 대해 묻기만 해도 백성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그의 너그러움을 칭송하는 이야기가 그날 저녁 백성들의 저녁 식탁에서 이야기되는 수준이었어.


조사단은 모든 잘못을 왕세자궁의 수하들에게 돌렸네.

수하를 관리하지 못한 왕세자는 유폐될 예정이었지만 우애가 깊은 막내 왕자는 형님의 유폐를 원하지 않았네. 형님이 자유롭게 살아가길 원했네.

왕세자는 일련의 일들로 인해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요양’을 떠나게 되었네.

왕세자의 측근들은 막내 왕자의 자비로움을 칭송하며 출근 장소를 막내 왕자궁으로 변경했네. 얼마 지나지 않아 막내 왕자궁이라 부르는 이는 없어졌네. 그곳은 이제 새로운 왕세자궁이라 불렸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병상에 계시고 형제자매들은 막내 왕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됐으며 큰 형님은 휴양지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지.

사내는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지난 후에나 그들의 심정을 알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눈을 돌린 것뿐이었네.

살짝 고개를 돌리고 왕궁의 상황을 모른 척만 하면 사내에게 가장 즐거운 것들이 눈앞에 가득했거든.

그래서 사내는 거의 모든 일을 궁에 출근하는 이들에게 맡기고 대부분의 시간을 학자와 대장장이들에게 할애했네.

아, 정정하지. 자신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믿는 귀족, 왕족들과 ‘총애를 받지만 설치지는 않는’ 백작에게 정치를 일임했네.

그들은 연합체라고 믿었지만 사내는 혹여 정치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때는 항상 백작과 의논했네.

백작은 사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선적으로 해결해 주었어. 하여 둘의 의견 조율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의 연장선상이 되었고 당연히 사내가 정치에 끼어드는 순간들이 줄어들었지.


사내는 대장간을 대대적으로 개선, 확충하고 ‘연구소’라 칭하곤 학자들이 머무를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어. 당연하게도 오직 사내만을 따르는 이들이 가득한 공간이었고 사내는 그곳에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하면서 언제까지고 이런 날들이 계속될 거라고 믿었네.

마치 동화의 마지막 순간에 ‘Happily Ever After.’, ‘めでたしめでたし。’, ‘그 이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고 적어 넣는 것처럼 말일세.


사내의 가족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사건은 해결됐으며, 막내인 자신에게 왕권이 넘어왔음에도 잡음은 없었지.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고 여전히 가족을 사랑하는 자신이 왕이 될 것이기에 가족은 누구도 불행해지지 않을 예정이었지.

그 모든 것이 사내의 호기심, 궁금증, 창의력이 해낸 일이라고 사내는 자부했네.


그가 왕이 된 이후 왕국은 점점 더 번성했으며 백성들은 왕을 칭송했고 사내는 행복하게 많은 것들을 궁금해하고, 만들어보고, 부숴보고, 뜯어보고, 확인하면서 호기심을 채울 수 있었네.

앞으로는 더욱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살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네. 사내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으며 이제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고 느꼈어. 단 한 가지만 빼고.


어느 날 귀족들의 청원으로 사내는 연구소에서 나와 왕궁 회의실로 향해야 했네.

그들은 전 왕세자, 큰형의 요양을 유폐로 바꿔야 한다고 했지. 가족을 사랑하는 사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그들이 원하는 한 가지를 내어주고 가족을 지켰네.

한 번의 양보에 귀족들은 만족했는지 한동안 잠잠해졌지. 하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네. 가족을 사랑하는 사내의 모습을 확인한 그들은 이번엔 다른 왕자들과 공주들의 처우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지.

사내는 분노했고 백작을 불러 단단히 일러두었네. 백작은 고개를 조아렸고 곧 귀족들은 조용해졌지.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그렇게 쉽게 끝나는 것이 있던가? 곧 사고가 터졌네.


큰형을 따르던 귀족들 중 일부가 반란을 도모하려다 발각되었네. 그들은 사내가 만들어낸 무기와 방어구로 무장하고 수도를 전복한 이후에 요양 중인 전 왕세자를 모시려 했지. 반란은 봉기 직전에 진압되었지만 귀족들은 때를 놓치지 않았어. 차마 큰형을 죽일 수 없었던 사내는 귀족들에게 다시 양보를 하고 형을 지켰지.


연구소에 처박혀 세상의 모든 신기한 것들을 파헤치던 그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형제들의 사고를 수습하러 왕궁 회의실로 향해야 했네. 너무 큰 제안은 백작을 통해 조율하고 작은 제안은 받아들였네.

어디까지나 가족을 위한 것이기에 적절하게 작은 정도의 피해라면 주저 없이 받아들였어. 백성에게 위해가 가는 방향의 제안은 백작의 선에서 제지당했기에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네.


처음에는 이런 양보가 탐탁지 않았지만 형이 연루된 반란을 겪고 나니 양보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네. 겨우 이 정도의 양보는 그냥 백작 선에서 해주고 나중에 알려줬으면 하는 마음도 생겼네.


그만큼 사내는 연구소에서의 일들이 재미있었거든.

사실, 연구소 밖의 모습들이 조금 진저리 쳐지기도 했네.

매번 사고만 친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가족들은 가끔씩 만나면 왠지 모르게 서먹했거든. 시간을 들여 조금 가까워지면 항상 앓는 소리만 해댔지.

가족은 항상 힘들고, 견디고 있으며 사내에게 무언가를 원했지.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줄 수 있는 만큼 내주었지만, 사실 조금 피곤했네. 아무도 자신에게 뭐라고 하지 않고 모든 신경을 한 곳에 쏟을 수 있는 연구소만이 그의 행복이었네.


‘가족을 사랑하는 왕’은 어느새 ‘가족을 사랑하는 황제’가 되고 ‘백작’은 ‘대공’이 되었지만 그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네.

귀족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했고 그것이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대공이 제지를 하지 않으면 사내는 그들과의 협상장에 끌려 나와야 했네.

왕실의 가족들은 이제 사내가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에 귀족과의 마찰을 무서워하지 않았어.


어느 순간이 지나자 사내는 자신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인지 ‘가족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지.

회의감을 안은 상태에서도 사내는 가족을 지켰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양보하는 마음은 어느새 포기하는 마음에 가까워졌네.

매번 불려 나가니 아예 가족을 위해 지켜야 하는 선을 정해두고 이 부분 이외에는 언젠가 다 양보하게 되겠구나, 하는 일종의 포기.

그런 마음을 먹고 나니 다시 편안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지.


사내는 생각했네.

세상에, 양보도 익숙해지는구나, 포기도 익숙해지는구나.

백성들이 세상에 군림한다고 생각하는 ‘황제’인 자신이 양보와 포기에 익숙해진다니 우습다고 생각했네.


한 번 인식하고 나니 그다음은 더 쉬웠네.

일정한 정도의 양보와 포기. 절대 넘겨줄 수 없는 선.

협상은 능숙해졌고 가끔은 아무것도 뺏기지 않기도 했지. 대공은 점점 더 나라를 키워갔고 사내가 쥔 것들도 당연하게 부풀어갔지.

그렇기에 귀족들에게 적절하게 분배하고도 사내가 쥔 것은 더욱 커져만 갔네.

도대체 어디까지가 내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커졌지. 나라가 커지고 황제의 권한도 커졌으니 당연히 재상인 대공의 권한도 커졌네.


대공은 이제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네. 사내와의 독대에서 대공은 선언했지. 이제 제국이 제대로 굴러가기만 한다면 다른 나라들은 알아서 무너지는 수밖에 없다고.

체급의 차이가 열 배 이상 나기 시작했기에 굳이 저들을 정벌해서 제국 내부로 적들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고. 적을 밖으로 둔 상태에서 속이 곪지 않을 체제를 준비하면 천년 이상 지속될 제국이 될 것이고 자신과 사내의 이름은 그 제국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각인(刻印)될 것이라고.

사내는 심사숙고 후에 대공의 제안을 받아들였네. 여전히 가족을 위한 선택이었고 황실은 존속될 것이었지.


이후 제국의 권력구도는 개편되었네.

이미 사내의 대장간과 연구소의 발명품을 통해 백성들은 농사를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축적된 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상업은 장려되어 왔네.

이제 대공의 의지에 따라 상인과 백성들을 억압할 수 없도록 귀족의 권한이 축소되기 시작했네. 귀족은 반발했지만 대공과 황제의 의지는 강했네.

심지어 황제가 나서서 스스로 몇 가지 권한을 포기하자 귀족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지.

심지어 먼저 귀족의 권한을 포기하는 이들은 이상할 정도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으며 명예를 드높였지.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 되었네.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귀족은 명예를 우선하게 되었고 관직만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으며 평민들에게도 시험을 통해 관직으로 나아갈 길이 열렸네.

그렇게 관직을 가진 자들이 회의체를 구성하고 대표자를 뽑아 황제에게 정책을 진상하는 형태였네.

사실상 황제는 그들의 법안을 거부할 순 있어도 새로운 법안을 주창할 수는 없는 구조였지.


대공이 구상한 나라는 그런 식이었네. 모두가 모두를 견제하는 형태.

단 한 사람의 특출 난 이가 이끌어 가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머리를 맞대어 굴리는 나라.

한쪽이 다리를 절어도 다른 다리로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라.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서로 견제하는 다수이면서도 결국 운명을 함께하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 나라.

체제를 만들고 안정시킨 이후에 대공은 만족스럽게 웃었네.


황제, 사내는 많은 것을 양보했고 포기했네. 그것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는 대공의 시야를 빌려 미래를 예측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족을 위한 것이기도 했네.

자신이 물러나고 나면 황제의 힘이 형제들을 향해 뻗어나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거든.

그렇기에 먼 미리에도 자신의 가족이 안전하고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네.


여전히 사내는 자신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인지 ‘가족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신은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알았네.


대공은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환하게 웃은 이후에 후련하게 병상에 드러누웠네.

그 병이 깊어간다는 소리에 사내는 대공과의 마지막 독대를 했지.

대공은 말했네. 이제 사내의 행복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은 원하던 모든 것을 이뤘지만 사내의 꿈은 이제 조금씩 견제를 받을 것이라고.


그것은 ‘대공’과 ‘황제’, 그 속의 ‘인간’을 오롯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이가 이제는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편으로는 대공이 만든 서로를 견제하는 체제 안에서 ‘황제’인 자신에게 반발할 수 있는 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네.

평생을 연구소와 왕궁 안에서만 살았던 사내는 여전히 세상을 몰랐고 대공은 그런 사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네.


“이제 와서 말씀드리지만 많은 것을 드렸고 또 많은 것을 빼앗아 죄스러웠습니다.

가장 죄스러운 것은 폐하께 처음으로 ‘포기’를 알려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익숙하게 길들인 것도 저이니 저는 저세상에 가서도 사죄해야 할 죄를 지은 셈입니다.


황제 폐하. 나의 황제이시어.

저는 항상 폐하께서 원하는 것을 하시며 사시길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의 소망과 충돌할 때에는 언제나 제 소망이 우선이었지요.


그것을 모두 받아주시고 너그러이 인정해 주실 때마다 저는 폐하께 감사하기보다 ‘포기에 익숙하게’한 스스로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되고 보니 남겨질 폐하께 너무나도 죄스러울 뿐입니다.

오직 저와 폐하만이 서로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아보았는데 저만 이득을 취해버려 앞으로는 폐하께 손해로 돌아올 것들이 눈에 선합니다.

이 죄스러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여 마지막 조언을 드립니다.

제가 가고 나서 귀족들이 폐하를 업신 여기는 상황이 온다면 참지 마소서.

그 첫 번째 순간을 절대 그대로 넘기지 마소서.”


사내는 대공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였네. 여전히 가슴에 의문을 품은 채로.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공은 서글프게 웃으며 황제의 손을 연신 쓰다듬어 주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은 세상을 떠났네.

사내는 연구소에서 나와 자신을 알아봐 주고 원하는 것을 부족함 없이 즐기게 해 준 이의 죽음을 슬퍼했네.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고 나라 전체가 대공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한 이후에 사내는 다시 연구소로 돌아갔지.


대공의 죽음 이후 나라는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네.

중심을 잡고 방향을 지시하던 이가 사라지니 모두가 그의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어.

서로를 견제하는 체제는 정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곧 새로운 재상이 선출되었으며 그를 견제하기 위한 위치의 이들도 선출되었네.

그들은 끊임없이 다퉜어. 처음엔 작았던 다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명분을 위해 황실의 가족들, 그리고 황자와 황녀들까지 끌어왔네. 황실이 엮인 싸움이 일어났으니 이후에 뒤처리에서 문제가 생겼네.


당연히 사내가 연구소에서 쫓아 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 예전처럼 적당한 양보와 타협이 이루어졌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회의체는, 재상을 비롯한 대표자들은, 황제가 양보했음에도 여전히 커다란 황제의 권한을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었네.

즉위한 이후 양보만 해왔음에도 여전히 커다랗고 탐스러운 저 권한들을.

정치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쥐고 있는 것만 많은 저 겁쟁이의 재산을.

대공이 고삐를 쥐고 있을 때에는 쳐다보지도 못했던 그 풍요로운, 주인조차 관심이 없는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은 보고야 말았네.


본능적으로 그 큰 덩어리를 혼자서는 깨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은 서로의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네.

그리고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황제를, 사내를 겨냥했어.

사내를 깨물기 위해서는 연구소에서 사내가 튀어나올 수 있어야 했고 사내를 단단하게 얽어매기 위해서 다시금 황실을 끌어들였지.

그 미끼에 놀라 튀어나온 사내를 그들은 아주 단단하게 깨물었네.

한번 깨물고 흔들 때마다 황제가 양보하고 떨어지는 황실의 재산에 환호했지. 다만 그것들은 연합한 이들이 나눠야 했기에 깨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어.

그들은 턱에 더욱 힘을 주었고 사내가 양보할 수 없다 생각한 것까지도 깨물었지.


사내는 이제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했고 사내의 발버둥에 회의체의 이들도 피해를 봐야 했네. 피해를 본 이들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으려 했고 싸움은 격화될 수밖에 없었네.

사내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네. 세상에서 눈을 돌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해오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학자들이 그토록 그를 따를 리가 없었지.

여전히 번뜩이는 지성으로 회의체가 주장하는 이야기의 모순을 짚어내고 그들을 몰아붙일 때쯤, 그들에게 포섭된 황실의 인사들이 나섰네.

그들은 대공의 뜻을 황제가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했어.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이와 평생 그 뜻을 함께 해왔다면 이제 그 마무리를 황제이며 파트너였던 이가 해야 할 순간이라고. 황제의 권한을 모두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가족이었네. 평생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많은 것을 양보하고 포기해 가며 황실의 권위와 이득을 지켜온 것은 가족들을 위해서였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친척도 아닌 평생을 보호해 온 형님과 누님들이 나서서 권한을 나눠야 한다고 말했네.

그들은 황제가 지고 있는 이득에만 관심이 있었지.

황제가 어떤 길을 걸었으며 어떤 식으로 그들의 울타리가 되었는지는 관심이 없었네.

아니, 보지 못하고 이미 잊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지.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던 막내가 왕이 되고 황제가 되었네. 심지어 나라의 모든 일은 대공이 주관했지.

자신이라면 더 정국을 잘 끌어갔을 거라 느꼈네.

대공이라는 수하가 있었기에 거머쥔 영광이었고 황제는 그저 업혀갔을 뿐이라 생각했지.

사내가 막내 왕자였던 시기에 보여주었던 것들은 이미 희미해진 지 오래였지.


황제는 맥이 탁 풀렸네. 자리에 주저앉았지. 그것을 어떤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모두들 희희낙락하며 황제의 이권을 탐했네.

황제는 정회를 선포하고 연구소로 돌아갔네. 그리고 밤새도록 고민했네. 어쩌면 답이 이미 나와있는 문제였지만 평생을 고민했던 것을 연장선상이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지.


해가 떠오를 무렵 황제는, 사내는 확신했네.

자신은 ‘가족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했노라고.

사랑했었노라고.


그는 대공이 아니었지.

대공은 ‘나라를 운영하여 역사에 남을 제국’을 만드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사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네.

사내는 자신의 호기심을, 지식에 대한 갈구를 해소하는 것이 우선인 사람이었네. 그 와중에 자신의 기준을, 선을 고수해야만 했기에 가족에 집착했던 것이었어.


이제는 꼭 나라를 위한 연구를 할 필요도, 가족을 위한 연구를 할 필요도, 인간을 위한 연구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지.

그저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해도 되는 순간이 온 거야.


사내는 해방감을 느꼈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던 어떤 선, 기준, 그것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라고 느꼈어.

그의 상상력은 무한하게 뻗어나가기 시작했네.

인간으로서 해야 하는 것들을 벗어나는 순간 궁금해할 수 있는 것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지.


양보와 포기, 물러섬에 익숙했던 이가 강요를 이기지 못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것들에게서 외면을 받는 순간, 자신의 존재 이유가 오로지 지식에 대한 갈구뿐이라고 자각(自覺)하는 순간, 그는 진정한 황제가 되었네.


그는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되었지.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밑의 이들을 모두 평등하게 깔아보고 무시할 수 있게 되었어.

그들을 인간이 아닌 객체로, 그저 사물로 보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지.


그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부의 인사를 소집했네.

회의체를 구성한 이들을 끌어내고 그에 동조한 왕실의 인사들을 끌어냈지.

그들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부를 빼앗아 새롭게 회의체를 구성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네.


새로운 회의체는 오로지 황제에게 충성하는 이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은 나라를 우선하기보다 황제의 지적 갈구를 채워주기 위해 움직였네.

그의 제국은 그 자체로 연구소가 되었어.

황제가 궁금해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하고 이후에 나라의 이득을 향해 움직이게 되었지.

이제 황제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은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어.

제국의 모든 이들은 부품으로 기능하고 교체되었으며 반발은 가장 효율적인 방향으로 숙청되었네. 제국의 강은 물 대신 피가 흐른다고 할 정도였지.


이후에 제국의 초대 황제인 사내를 사람들은 몰래 괴물이라고 불렀네.

이상하게도 그는 늙지 않았고 오래도록 황제의 권좌에 앉아 있었네.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갈수록 그는 더 젊어지는 것처럼 보였지.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는 황제로 머물렀네.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는 단 한 가지에 집착했네.

여전히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어. 여전히 많은 것을 궁금해했지.

하나를 알게 되면 항상 거기에 연관되는 두 개가 궁금해졌네. 궁금증은 끝이 없었지.


그의 치세에서 백성들은 행복해야 마땅했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그는 ‘알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갈아 넣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어. 사람들은 그가 어떤 것에 호기심을 가지게 될 것인가 두려워했어.

백성들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매일 사람들이 죽어 나갔으니까.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인데, 미지의 지식을 알아내기 위해 어떤 희생을, 언제까지 치르게 될지 알 수가 없으니 그저 두려워하다 죽어가는 수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저주하고 미워하며 죽어갔으며 그들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 때문에 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네.

수많은 질시와 미움과 저주와 칭송과 숭배를 받으며 그는 신(神)이라기보다는 귀신(鬼神)에 가까운 존재처럼 여겨졌네.

그는 재앙과 복을 함께 몰고 다니는 존재라고 불렸지.

어느 순간 그는 도깨비라 불리고 있었어.

그리고 먼 훗날 그는 도깨비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네.


제국은 번영했고 누구나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했으며 황제 이외에 모든 계급은 유명무실해져 누구나 귀족이 될 수 있었어.

자신의 능력 만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곳, 제국 밖의 백성들은 모두 제국을 동경했네.

겉으로 보기엔 가장 강력하고 자유로운 강대국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치세에서 제국민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고 죽음에 익숙해졌으며 죽음조차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희망조차 품지 않았다네.


죽지 않고 모든 것에 호기심이 왕성한 황제는 변하지 않았고 그것에 익숙해져야만 현실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지.

사회가 주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 그 가혹하고 일방적인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시작점에 설 수 있기에 그들은 체념하고 포기하게 되었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 나서야, 제국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네.


그것은 사회가 하는 가스라이팅과 같은 것이었네.

제국을 벗어나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하는 단체가 개인에게 하는 가스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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