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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픔에 익숙해지면

- 무뎌진다는 그 한 발 물러섬에 익숙한 그대에게

by 블랙스톤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는 사람. 크게 바라는 것이 없고 그저 평범하다 못해 무기력한 하루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사람.

그러면서도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여 다른 이들이 각자 뭔가를 소망하는 것처럼 떠들면 내게도 뭔가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 사실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기에 크게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무언가를 할 때 생기는 ‘변화’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

세상 다 산 노인도 아닐 텐데 변화의 새로움보다 일상의 고요함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

별의별 이가 모여사는 사회에 그런 사람이 하나 둘 있다는 것이 이상할 리는 없다.

다만, 이바구에 그런 사람이 온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에미Emmy는 바에 앉아 취하지도 않은 채 마스터에게 뭐라고 떠들고 있는 안경잡이를 바라보았다. 제 몫의 안주에 손도 대지 않고 칵테일을 쥐고 계속 주절주절 대는 사내.

말하면서도 연신 마스터의 모습을 확인한다.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고르는 듯하다.


이바구의 주방은 바 한쪽과 연결되어 있으며 굳이 주방 입구를 막아두지 않았기에 들여다보려면 얼마든지 안쪽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당연히 안에서 밖을 보는 것도 아주 쉬웠고 여러 손님이 방문하지 않는 가게 특징상 에미는 안주 만들 때를 빼면 항상 주방 입구에 마련한 의자에 앉아 바의 손님을 구경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구경할 맛이 나는 손님이다.


아무리 좋은 풍경이라도 매일 보면 질리듯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들어온 손님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일상이다. 다만 저렇게 주절주절 자신조차 믿지 않을 이야기를 하며 마스터가 원하는 이야기를 찾는 손님이 오면 그야말로 진귀한 구경이 있는 날이 된다.


에미는 이 진귀한 구경을 하며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상상의 나래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도대체 이바구의 문은 어떻게 발견한 거지?

저 사람에게도 과거 꿈의 잔재가 남아 있는 걸까? 혹은 과거에 대한 미련? 미래에 대한 기대?


감춰진 뭔가를 파헤치는 건 흥미진진한 일이다.

특히나 반복되는 일상에 흥미로운 변화가 눈앞에 보이는데 그것이 내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고 나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구경'이라면 완전 횡재다. 길 가다 돈을 주운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다.

아, 물론 돈은 여기서 쓸 일이 없으니 더 그렇기도 하다. 에미는 혼자서 작게 웃었다.

혼자 실실 웃어댈 수 있는 상상이 주어지다니 기분 좋은 날이다.


그런 에미의 생각을 알았는지 혹은 콧노래와 작은 웃음소리를 들은 건지 바의 마스터가 슬쩍 고개를 돌려 에미를 바라본다.

저건 손님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겠지만 에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자신이 생각해도 예쁘고 싱그러운 웃음을 보여주었다.


마스터는 멈칫했다가 이내 바의 손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언제나 느끼지만 예쁘고 잘생긴 건 최고야.

그런 의미에서 태어나서 제일 잘 한건 마스터가 주는 첫 번째 선물로 '아름다움'을 선택한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아름다움이라니.

오! 에미는 자신이 생각한 이 표현이 주는 미묘함이 마음에 들어 다시 한번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겁니다. 실적에 경력도 빵빵하고 최근에 연달아 성공한 프로젝트의 최초 발안자가 저인데 왜 저만 진급이 되지 않는 거죠? 회장님조차도 제 이름을 알아요. 수고했다고 부장님을 통해 격려도 내려왔다고요. 그런데 도대체 왜 진급이 되지 않는 걸까요.”


사내는 말하다 목이 마른 지 칵테일을 홀짝였다. 처음 마시고 멈칫하더니 다시 한번 칵테일을 음미한다. 이제야 칵테일의 맛이 제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에미는 턱을 괴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칵테일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면 안주가 당기기 시작할 텐데.

사내는 안주를 몇 번 먹더니 슬쩍 바 위의 티슈를 끌어다가 입 근처를 닦았다.

에미는 끌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입 주변을 매만져야 했다.


단 한 사람의 입맛에 맞춰진, 언제나 원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칵테일을 마시고 아작아작하니 씹는 맛과 소리가 일품이라 뱃속에 담아뒀던 원하던 것을 슬슬 소리 나게 읊어보고 싶은 안주를 먹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입을 먼저 닦는 사내라니.

이번에는 정말 보기 힘든 구경을 하게 생겼다.

에미는 연신 사내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후에 있을 이야기를 기대한다.


“도대체 누구일까요. 김 과장? 천대리? 어쩌면 부장님까지 함께일지도 모르죠. 이만큼이나 성과를 내는데도 진급이 되지 않는다면 아마 앞으로도 분명히 저는 진급하기 힘들 거예요. 이건 확실해요. 저를 음해하는 세력이 있어요. 전 그냥 제 노력의 대가를 받고 싶을 뿐이에요. 아무리 진급하더라도 어떤 풍파를 일으킬 생각이 없어요. 그냥 조용히 월급을 받으며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 정년을 하고 나이가 들면 조용히 전원생활을 하는 게 바라는 전부인데 말이죠.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제가 뭔가를 잘못한 걸까요? 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잘못을 했다면 전부 저를 음해하는 사람들이 잘못한 거죠. 그 세력이 잘못된 거예요. 제가 아니라. 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어요.”


안경잡이 사내는 마스터가 건네준 잔을 받고 이야기를 멈췄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이내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칵테일은 쉽게 사내의 목으로 넘어갔지만 사내의 잔에는 반 이상의 칵테일이 남아 있었다.

다시 사내는 안주를 몇 개 집어 먹고 꼼꼼하게 입을 닦았다.


에미는 몸은 이제 앞으로 기울이다 못해 숫제 의자 앞으로 쏟아져 넘어질 것 같았다.

그런 주변과는 상관없이 안경잡이 사내는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입을 꼼꼼히 닦고 휴지를 한 곳에 모아 둔 후 안주와 칵테일을 슬쩍 정해진 곳에 다시 정렬시킨다.

에미의 입꼬리는 이제 가릴 수 없을 만큼 올라갔고 그에 따라 그 커다란 미소는 손으로 가려봐야 그 너머로 다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가 봐도 너무나도 즐거워 보이는 에미. 이제는 숫제 가릴 마음도 없어진 듯 보이기도 했다.


사내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활짝 웃었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마스터를 보고 입을 열었다. 이내 뭔가 우물거리다가 입을 닫는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손가락을 들어 바 테이블을 딱 두 번 소리 내어 두들기고는 그 소리에 놀란 듯 마스터를 슬쩍 바라보고는 두드리던 손을 멈춘다.

다시 한숨이 흘러나오고 그 틈을 비집고 향긋한 술내음이 사내에게 다다른다. 사내는 몇 번이나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 칵테일을 마셨다.


마스터는 자연스럽게 세 번째 잔을 내밀었다.

사내는 이번엔 안주를 먹지도 않고 칵테일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사내가 입을 열었을 때, 여전히 망설임이 남아 있었지만,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사내는 말을 골라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저를 이해해주지 않죠? 저는 그냥 누구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고 피해를 받고 싶지도 않을 뿐인데. 사람들은 제게 항상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요. 저는 그것에 만족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멈춰줬으면 좋겠어요. 굳이 데려다가 어떤 변화를 주려고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런 변화들이 저를 행복하게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변하지 않는 제 반응에 지치거나 질려버리더군요. 변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일까요. 한결같은 사람은 좋은 것 아니었나요. 원칙을 지키는 것은 저도 귀찮을 때가 많죠. 그렇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나중에 찾아올 불편함이 더 싫을 뿐인데."


에미는 사내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점점 더 상대가 맞장구치기 좋은 말보다 속내에 가까운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다만 아직도 저게 솔직한 속내가 아니라는 것에서 에미는 눈을 반짝였다.

세 잔의 칵테일이 나가는 동안에도 소중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으니 마스터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가 됐는데.


마스터는 닦던 잔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아직 마스터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사내는 잠시 안주와 칵테일을 즐겼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대여섯 번 두드리며 생각을 한다. 톡톡톡.

아까는 그 소리가 마스터에게 불편함을 줄까 놀라더니 이번엔 그 소리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졌고 사내는 그 소리에 맞춰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날이네요. 그냥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불편해서,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제가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곤 해요. 그런데 정작 아무도 저를 봐주지 않으면 왠지 제가 작아져서 누구의 눈에 띄지 않아 사라질까 봐, 아 이 표현은 정정할게요. 누군가에게 치여도 아무도 느끼지 못할 까봐서 그게 무서워요. 저는 그냥 겁쟁이라."


에미는 솔직하지 못하지만 신중한 사내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고 이내 마스터의 미간이 전혀 찌푸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오늘은 운이 좋네.

어쩌면 마스터의 이야기를 듣게 될 수도 있겠다.


사내는 남은 칵테일과 안주를 모두 비울 때까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티슈를 꺼내어 입을 닦지도, 테이블에 흐트러진 잔과 접시, 그리고 휴지를 정리하지도 않았다.

이바구 안의 마스터와 사내와 에미는 가만히 들려오는 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아주 잔잔해졌고 마치 저 멀리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 소리가 천천히 바뀌어 은은하게 들리는 숲 속의 바람소리가 되었을 때 마스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사내가 있었지. 사내는 항상 궁금했다네. 세상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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