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남순 Feb 29. 2024

낯선 공기 되어보기

목적지가 없어도 간다.

   

7월 아침, 산책길에 논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동네 아저씨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뭐 하고 계세요?”

“물 대고 있시다.” 허리를 굽히고 일을 하고 있던 아저씨가 허리를 펴며 웃는다. 동네 아저씨의 사투리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근데, 물은 왜 자꾸 넣었다 뺐다 해요?”

“모내기할 때는 물이 있어야 하지만 조금 더 자라서는 물을 뺐다가 꽃필 때쯤 돼서는 또 물을 넣어줘야 해요.”     


아저씨는 귀찮은 기색 없이 내 질문에 웃으면서 대답해 주신다. 한 때 대학을 떨어지거나 취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 그렇게 어영부영 살려거든 시골 가서 농사나 지어라.”라는 말을 하곤 했었다.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농사 그거 쉬운 거 아니거든요.”     


배꽃집 주변은 온통 논이다. 몇 걸음만 걸어도 금방 시원하게 펼쳐진 논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처음 배꽃집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런 곳에 집이 있을 줄 몰랐어요”. 놀람이 담긴 말을 종종 듣게 된다. 내 경험으로도 그렇다. 깊은 산속에 있는 집은 간혹 가보기도 하고 지나가면서 보기도 했지만 들 가운데 있는 집은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풍경이다.      


흔치 않은 풍경 속에 자리를 잡은 덕에 배꽃집을 찾는 손님들 중에는 뜻밖의 경험을 하는 이들도 있다.      


“사장님, 저 오다가 저기서 막걸리 한잔했어요.”“어디서요? 저기 창고 같은 곳 있죠? 거기서요.”

“아... 건조장? 거기는 가을에 수확한 벼를 말리는 건조장이라고 해요. 거기 사람들이 있죠?”“네. 아저씨들 몇 명이 앉아서 술을 마시더라고요. 그래서 인사를 했더니 이리 와서 막걸리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해서 술이랑 고기 얻어먹었어요.”

“지금 모내기철이라서 아저씨들이 참 드시고 계셨구나. 시골에서는 인사 잘하면 어른들이 이뻐라 해요. 인사 잘해서 술 얻어 마셨네.”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는 버스 여행자였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려서 푸른 들 풍경을 보며 성큼성큼 걸었을 것이다. 그러다 한 번쯤은 의문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맞게 가고 있나...?’ 의심하면서도 걷기를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모내기를 시작한 5월의 들 풍경을 한 번 본 사람이라면 그 풍경을 얼마쯤 더 눈에 담고 싶었을 테니까.

그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저앉아 있는 아저씨들을 보았을 것이다. ‘커다란 저건 뭐지? 설마 배꽃집...?’ 미심쩍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동시에 인사성 밝은 청년은 저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창고 앞에 앉아서도 아저씨들은 청년이 걸어오는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 곳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 눈에는 낯선 사람을 감별하는 탁월함이 장착되어 있으니까. 청년의 인사를 받은 아저씨들은 도시 사는 손주가 찾아온 듯 반가움에 가슴이 일렁였을 것이다. “어이. 이리 와서 막걸리 한잔 해.”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는 청년의 이야기로 영화 같은 장면들이 머리로 흘러간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술잔을 나누는 것 또한 5월의 풍경이다.     


5월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싱가포르에서 온 아델린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다. 아델린은 한국 여행 8일째 되는 날 배꽃집에 왔다. 강화도를 찾은 이유를 ‘자연이 좋아서’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논 풍경 Rice Field을 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델린은 배꽃집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아이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싱가포르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라고 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아의 경제 강국이지만 국토 면적은 전 세계 176위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보다 작은 섬나라이다. 경작 면적은 육지 면적의 2프로밖에 되지 않아서 대부분의 식량은 수입에 의존한다. 쌀 재배를 하지 않는 동남아 국가가 내게는 더 신기했다.     


난생처음 벼가 자라는 모습을 본 아델린과는 자전거를 타고 일렁이는 초록 바다로 뛰어들었다.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쭉 달려 바다로, 다시 돈대로, 그리고 최종 목적지는 현지인들이 많이 가는 칼국수집이다. 바닷가에 자리한 칼국수집은 문이 열려 있었다. 가끔 걷기를 하고 싶을 때, 또 지인들이나 게스트들과 함께 걸어서 그곳에 가곤 한다. 말하자면 단골집인 셈이다. 2시간쯤 열심히 걷고 난 뒤에 맛있는 칼국수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힘이 절로 난다. 운동을 핑계 삼아서, 때로는 칼국수를 핑계 삼아서 찾게 되는 집이다.   

  

사장님은 종업원 없이 혼자 일 하신다. 직접 반죽해서 칼로 썰어서 만들어주는 진짜 칼국수다. 예전에는 사장님 남편과 두 분이 일을 했다. 안주인이 음식을 만들고 바깥주인은 주방 서빙과 카운터 담당이었다.

촉촉하게 비가 내린 어느 날이었다. 거침없이 노는 것에 코드가 딱 떨어지는 친구와 칼국수집을 목표로 길을 나섰다. 그날은 핑계가 칼국수였고 목적은 내리는 비 다 맞아버리기였다. 느릿하게 비를 맞으며 식당에 도착했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간은 점심이 지나 오후 3시 가까이 된 시간이었다. 텅 빈 식당에 사장님이 혼자 울고 있다. 가만히 기다렸다. 사장님이 얼굴을 가다듬고 칼국수 주문을 받았다. 잠시 후 끓여 온 칼국수 그릇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넓은 그릇에 담겨 나온 2인용 칼국수 양이 너무 많았던 거다. 게다가 함께 온 친구는 극소식자다. 사장님의 눈물을 자르고 만들어 준 음식을 꾸역꾸역 먹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부엌 옆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사장님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장님, 죄송해요. 다 못 먹겠어요. 사장님이 너무 많이 주셨어요.”

사장님이 웃었다.


사장님 남편이 돌아가신 지 2년쯤 되었다. 비가 내리는 날 가신 남편 생각이 났었던가 보다.

아델린과 던 날은 화창했다. 가게도 손님들로 붐볐다. 그날은 사장님의 눈물을 끊을 일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사장님 표 손칼국수를 맛있게 다 먹었다.


아델린은 3일을 머물고 다시 벼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는 나라로 돌아갔다.

빈자리의 추억을 쓰다듬으며 나는 다시 들로 나갔다. 5월의 풍경 속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