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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아찌를 담고서

24년 9월 113일 금요일

by 보리남순

미처 따 먹지 못한 고추가 빨갛게 익고 있다. 빨간 고추를 따서 보리밥 두어 숟가락과 액젓 조금 붓고 믹서기로 드르륵 갈아 풋풋한 열무에 붓고 슥슥 무쳐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 목에서 꿀떡꿀떡 소리가 날만큼 맛있다. 큰 양푼 가득 밥을 비벼도 모자라 숟가락으로 전쟁을 치르며 아웅다웅 퍼먹던 기억이 어제 같기만 하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뒤에는 먹는 것도 시들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장 맛있는 밥은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밥이다.


빨간 고추는 익게 두고 파란 고추만 골라서 땄다. 고추를 씻어 물기를 말리고 한 개씩 집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자른 고추를 통에 넣고 간장, 식초, 효소와 소주를 섞어 만든 양념장을 고추가 잠기도록 부어놓았다.

고추를 잘라서 만들면 숙성이 빨리된다. 반나절만 재워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만큼 양념이 잘 밴다.


오늘 만든 고추장아찌는 친정 부모님께 가져다 드릴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키운 고추로 담근 장아찌가 가장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운다. 추석이 목전이다. 시댁 어른들이 세상을 뜨시고 난 뒤부터는 친정에서 명절을 쇠고 있다. 친정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고령자이다. 몸이 불편한 엄마를 대신해서 아버지가 집안 살림을 도맡은 지 벌써 여러 해 째다. 아버지는 특별한 질병은 없지만 92살 고령이다. 해마다 기력이 다르다. 그래서 명절과 생신만큼은 자식들 손으로 차리려고 해도 부지런한 아버지의 천성은 아무도 못 말린다. 명절 전에 전화로 "이렇게 이렇게 저희끼리 분담하기로 했으니 아버지는 밥통에 밥만 안쳐주세요."라고 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주름진 손으로 차린 고기와 생선 나물 밥상에 앉아 받아먹자니 면목이 서지 않는다. 속상한 마음에 "하시지 말라니까 왜 하셨냐?"라고 뾰로통해서 따졌더니, "그래서 쪼금만 했다"라는 아버지 말씀에 그냥 웃고 말았다.


올해도 동생들과 추석 음식을 분담했다. 나는 명절상 나물반찬과 두고 드실 반찬 몇 가지를 더 만들어 갈 참이다. 고추장아찌를 만들고 나서 또 밭을 더듬고 있다. 무얼 좋아하시려나...?

추석이 되기 전까지 아버지께 전화를 몇 번 더 드려야 할 것이다. "아버지, 진짜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밥만 하세요, 아셨죠?"

"알았다", 대답은 하시겠지만, 요즘 들어 자꾸 깜박깜박하시는 탓에 어쩐지 올해도 불안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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