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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림없다, 까치야!

24년 9월 20일 금요일

by 보리남순

어림없다, 까치야!

너는 벌레나 먹엇!

어릴 때 먹던 토마토는 변변찮은 과일이었다. 엄마는 자른 토마토에 설탕을 쳐 주었다. 우리 형제들 중 누구도 설탕을 치지 않은 토마토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한창 먹성이 좋을 때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가정 교과서에서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라 '채소’라고 했을 때 놀라기보다는 ‘그러면 그렇지’ 절로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의문이 들었다. 물컹거리고 밍밍한 이 채소로는 무얼 만들어 먹지?


시간이 많이 흘러 내 텃밭을 갖게 되었다. 뒷집 사람이 심고 남은 거라면서 토마토 모종 몇 개를 담장 너머로 건네주었다. 어린 모종에서 빨간 토마토에서 나던 풋풋한 풀 향기가 났다. 호미로 땅을 파고 모종을 심고 자주 물을 주고 가꾸었다. 그리고 한여름 빨간 태양이 머리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었을 때, 반짝이는 녹색 구슬 같던 열매가 여름 태양빛처럼 빨갛게 익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것이 어릴 때 나와 우리 형제들이 설탕을 쳐서 먹었던 주먹만큼 큰 토마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한입에 쏙 넣어 먹기 좋은 방울토마토였다.


내 손으로 키워 먹은 토마토는 어릴 때 사 먹던 밍밍했던 바보맛이 아니었다. 단단하고 야무진 맛이 났다.

요즘은 토마토를 넣어 만드는 요리가 많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맛있게 토마토를 먹을 때는 밭에서 따 먹는 토마토다. 일하다가 목이 마를 때, 배가 고플 때 따먹는 토마토가 제일 맛있다.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 한 개를 옷에 슥슥 문질러서 한입 크게 베어 먹으면 풍부한 과즙이 툭 폭발한다. 절대로 밍밍한 토마토 맛이 아니었다. 달고 시고 맵고 쓰고 짠 오미가 다 들어 있다. 어느 맛 하나 크게 튀지 않는 토마토는,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채소로 분류되고 또 다른 나라에서는 과일로 불리는가 보다.


텃밭 농사를 짓게 된 이래로 한해도 거르지 않고 토마토를 심고 있다. 요즘은 해마다 신품종 토마토가 나온다. 검은색을 띠는 흑토마토가 나오더니 이제는 노란색, 주황색 토마토와 함께 초록색 토마토도 있다. 맛도 영양도, 크기도, 색깔도 다양해졌다. 붓대에 숨겨서 몰래 씨앗을 들여오던 시절의 이야기는 어느새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국경을 넘지 않아도, 이제는 필요한 씨앗을 직접 개발하는 시대다. 토마토를 두고 과일이냐, 채소냐와 같은 분류는 의미가 없다. 종류와 맛이 다양해진 토마토는 과일로도, 채소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게 토마토는 키우기 쉬운 작물 중 하나였다. 충이나 균의 피해가 없는 토마토는 제때 곁순 제거와 가지 유인만 잘하면 우리 가족이 먹을 만큼 충분한 수확이 보장됐다.

그런데 올해는 내 밭에서 자라는 토마토가 영 말이 아니다. 처음으로 내 밭 토마토에 토마토배꼽썪음병이 생겼다. 그것만 해도 속상한데, 잘 익은 토마토 중에서 반토막이 날아간 것들이 여러 개 눈에 보였다. 반 남은 토마토를 들여다보니 먹은 흔적이 남아 있다. 누가 내 토마토를 훔쳐 먹었을까?

'혹시 고라니가 다시 들어온 걸까?' 의심되는 마음에 몇 해 전 밭작물을 뜯어먹는 고라니 때문에 비싸게 주고 설치한 펜스 주변을 살폈지만 구멍을 찾지 못했다. 고라니가 아니라면 누굴까? 어쩌면 나무 위에서 까악 까악 태평하게 노래하고 있는 저 까지가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로 까치를 쳐다보자 까치가 내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까치는 무리를 이루어 사는 새다. 집에서 키우던 개도 달려드는 피해 도망갈 정도로 까치떼는 드세다. 까지가 내 밭에 날아들고 뒤부터는 참새나 직박구리, 오목눈이 같은 작은 새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반쯤 파 먹은 토마토 까치짓이 분명했다. 한 개를 온전히 다 먹는 것도 아니고 잘 익은 토마토마다 쪼아 먹은 흔적이 남았다. 토마토는 내 거야. 너는 벌레나 먹엇!

토마토를 키우는데 힘하나 들이지 않은 까치떼에게 더 이상 토마토를 뺏길 수 없어 부지런히 밭을 드나들어 수확을 했다. 그렇게 했어도 예년에 비해 수확량은 반토막밖에 되지 않는다. 양이 줄어들어서 올해 토마토는 더 귀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먹는 것도 복잡하지 않는 방법이 좋다. 토마토를 살짝 끓여서 믹서기에 갈아 주스로 마시기도 하고 오이나 맛없는 참외 같은 것을 납작하게 썰어 토마토와 섞어 올리브오일을 뿌려 먹는다. 가끔은 큰 아이가 사준 트러플 액스트라버진 올리브 오일로 사치를 부린다.

샐러드보다 더 많이 해 먹게 되는 음식은 토마토를 넣고 끓인 죽이다. 토마토, 단호박, 콩을 잘라서 한소끔 후루룩 끓인 후 믹서기로 갈기만 해도 간편하게 죽이 완성된다. 아침으로 먹거나, 속이 불편할 때, 손님을 접대를 할 때는 전체음식으로 내놓는다. 잘게 자른 토마토와 단호박이 냉동실로 들어간다. 겨울 양식이다.

일 년 양식이 될 토마토를 까치가 나누어 먹자고 덤비다니!

어림없다, 까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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