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다운 바위풀 Nov 15. 2017

전업 육아, 전일제 아빠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미국에 와서 전업 육아를 시작한 지 세 달 째가 되어간다. 그런데 좋아하는 존 버거님의 글귀를 빌리자면, 전업 육아란 일을 하면서 출퇴근 전후로 가끔씩 아이들을 돌보는 것과는 그 "별자리 자체가 다른" 전혀 딴 세상의 이야기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내가 아이들 좀 볼 줄 아는 남자요'라는 자신감 같은 것이 있었다. 서울에 있는 동안 평일 저녁에도 큰 아이는 언제나 내 담당이었고, 돌보미 이모님이 집에 가시는 주말은 두 아이들이 온전히 내 차지였다. 프랑스에 머물던 시절 큰 아이를 돌보면서 학교를 다니던 것까지 생각하면 ‘일반적인’ 남성과 비교해 보았을 때 내 육아 경험은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전업 육아는 단순히 물리적, 정신적 일감이 늘어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육아가 온전히 나의 것이 된 순간 같이 짊어지게 된 책임감의 무게와 일의 범위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서 좋은 점도 분명히 있지만 그만큼의 어려움이 늘어나, 그전의 워킹대디 생활과 비교하여 무엇이 더 나은지 얘기하기는 어렵다. 다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그리고 다른 이도 아닌 나의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일이라면, 역시 내가 하는 것이 낫겠지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전업 육아를 하는 전일제 아빠라는 건 한국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이곳 미국에서도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닌지라 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얼마 전 들른 은행에선 계좌 개설을 위한 업무 처리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 직원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 아내가 이곳에서 일을 하는구나. 그래서 넌 뉴욕에서 뭐 하는데?”

“응, 내가 애들을 돌보고 있어.”

“……아, 그래?”

“한국에 있는 회사에서 1년 육아 휴직을 받았거든.”

“우와, 좋네. 거기 어느 회사인지 나도 일할 수 있을까?”


뒤따르는 내 대답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표정이 사라지며 농을 던지고는 다시 업무 얘기로 돌아간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주 마주치는 노부부는 내가 아이들을 돌본다는 얘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원래 육아 휴직은 처음의 내 계획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가족들이 같이 더 많이 함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회사에도 사의를 표명했다. 다만 어찌어찌하여 입은 호의에 당분간 휴직을 하며 한번 더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뿐이다.


회사를 그만두려 할 때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역시 ‘그럼 이제 나는 무엇인가’였다. 삼십몇 해의 삶에서 키워 온 알량한 자존감이란 건 학교든 직장이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안정감이었는데 그 껍데기가 사라져 버리면 나는 무엇인가. 내 아이들을 잘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면서도 무언가 내가 지워져 버리는 것 같은 두려움은 쉬이 떨칠 수가 없었다.


이는 그저 낮은 자존감을 지닌 나만의 푸념이 아니라, 아마도 대다수의 전일제 엄마, 아빠들(물론 주로 엄마들이겠지만)이 비슷하게 느끼는 고민일 것이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또는 그 어딘가에서든 자신의 자리가 있던 생활에서 오직 아이들만이 찾는, 그리고 그것에 모든 시간을 쏟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는 건 무언가 이 세상에 나의 자리는 없는 듯한 느낌이다.


전에도, 지금도 계속 고민 중이다.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 아이들을 건강히 돌본다는 것 자체만으로 비교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나만이 가질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스스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와 무게를 지닌다.


이렇게 끄적여 봐도 물론 답은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일 년 뒤의 내 선택은 다시 사회 속의 내 자리를 찾으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나만의 가치를 찾아내던지. 다만 무엇이 되었든 이도 저도 아닌 타성에 젖어 떠밀리듯 내 앞길을 선택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자기 연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