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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Mar 11. 2021

그 시절의 윤동주, 송몽규 그리고 몽실언니

영화 <동주>

민중이 민중을, 국가가 국가를 착취하고 수탈하기를 일삼았던 시대. 노력한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타의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이 더 많았던 시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슬프고 아팠던 시대를 서로 다른 기질로 살아낸 이들이 있다. 해방 직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와 송몽규, 해방 직후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비루한 인생을 보내는 허구의 인물 몽실언니. 이들 개인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윤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는 시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꾸준히 책을 읽고 시를 써낸다. 자신의 곁에서 끊임없이 민족을 위해 행동하는 몽규를 보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것'이라는 정지용 선생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는 시에 더 적극적으로 부끄러움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를 떠올릴 때면 밤하늘에 일렁이는 별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그가 <참회록>, <별 헤는 밤>, <서시> 등에 써낸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맑고 진정성 있다. 그 이유는 윤동주가 계속 행동하려 시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서 끝나지 않고 그는 몽규의 일에 동참하려 한다. 다만 그보다 시에 대한 사랑이 더 커서, 그럴 때마다 윤동주는 또다시 부끄러움을 마주하고 이를 시로 썼다.


송몽규 - "동주야 너는 시를 써. 총은 내가 잡을게."

송몽규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일본에서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을 모아 혁명을 꾀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넘어가는 등 위험한 일도 꺼리지 않는다. 그만큼 주권 회복을 위해 전투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항상 그의 행동에는 큰 그림이 있다. 그런 송몽규이기에, 사실 시는 감성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한다. 민중을 감성적으로 이끌면 혁명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동주 앞에서는 다르다. 몽규는 동주의 시를 사랑하고, 시를 사랑하는 동주를 아낀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위험한 혁명에 동주가 함께하려고 하면 그러지 말고 시를 쓰라고 말한다. 혁명의 글을 싣기 위해 만든 학생 잡지에 다른 사람들이 쓴 시는 (감성적이기 때문에) 넣지 않지만 동주의 시는 꼭꼭 넣는다. 그러니까 송몽규는 타고난 똑똑함으로 민족을 위해 행동하지만, 동주에게만큼은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내면서, 동주를 지지한다.


몽실언니 - "나쁜 건 따로 있어요. 어디선가 누군가 나쁘게 만들고 있어요."

사진 출처: 창비 <몽실언니>

아직 어린아이지만 '언니'란 호칭이 붙은 것은 동생들과 아버지를 위해 책임감 있게 산 까닭이요, 사람들을 입체적으로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친어머니, 새어머니, 아버지, 난남이, 영득이, 영순이까지. 몽실은 매 순간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움직인다. 절름발이로, 구걸을 하기도 하고 여러 고개를 넘어 먼 길을 가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 몽실은 군말이 없다. 눈물도 참고 참는다. 오로지 부모님과 동생들을 걱정할 뿐이다.


몽실은 사람들이 '나쁘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나쁘게만 보지 않는다. 지금이야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해방 직후의 삶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과 가난의 연속이었다. 몽실은 그런 상황에 너무 빨리 철이 들어서일까, 사람들을 이해할 줄 알았다.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간 어머니도, 몸을 파는 금년이도, 몽실이는 그들이 선택한 삶의 이면을 본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나쁜 게 아니라 상황이 자꾸만 나빠지는 것이라고.


송몽규와 윤동주가 그토록 열망했던 해방 이후, 끝나지 않은 절망의 시대를 버텨낸 어린 몽실이가 있었다.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몽실언니>는 그 무자비한 상황 속 어쩌면 나쁘고 싶어서 나빴던 사람은 없지 않았을까, 라는 새로운 시선을 보여준다.



작고 작은 개개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혁신을 행하고, 부끄러움을 새로이 마주하고,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가난을 버티어 냈다. <동주>와 <몽실언니>는 그런 개인들의 삶을 스토리로 재조명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들 고유의 기질은 모두 달랐지만, 원하는 인생을 꿈꾸며 어떻게든 노력해 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삶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을 수 있기에, 우리는 자주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p.s.

특히나 영화 <동주>가 좋았던 이유는 윤동주와 송몽규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시인이기 전에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청년이었고, 경쟁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20대 청춘이었다.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돌아보고 아름다운 시 이면의 그의 삶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송몽규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감사하다. 영화를 보며 어쩐지 자꾸만 송몽규의 모습에 울컥했던 것 같다. 스토리를 전하는 콘텐츠가 이 사회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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