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적>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절의 풍경이 바뀐 지 오래다.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차례를 지내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하긴 하지만 비대면 문화와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은 그 문화를 조금은 ‘옛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 가족도 코로나 이후로 모든 친척이 다 같이 모이는 문화는 사라졌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 현상에 대해 ‘오히려 좋다’고 말한다. 여자만 많은 일을 하는 풍경도, 불편한 명절 단골 질문도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게 명절은 조금씩 ‘가족 대명절’보다도 ‘현대적 연휴’로서의 성격을 더 갖게 된 느낌이다.
그런데, 이번 추석 연휴 동안 보게 된 <기적>이 과거 명절 풍경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다 같이 모이지 않으면 편하고 좋지 뭐, 라는 이성적인 생각을 북적북적한 분위기에 대한 감정적 그리움이 덮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영화 속 사람들의 정겨운 말투와 시골 감성의 간이역, 운동장 입학식 풍경 등. 코로나와 바쁜 일상 속에 사라진 옛 모습들을 마주하니 ‘저때가 좋았지..(먼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지키고 싶은 분들이었을까. 영화를 찬찬히 보다 보니 옛 시골 풍경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동까지, <지키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중 두 가지 마음에 대해 기록을 해두려 한다.
[아들의 꿈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마음]
영화 초반부터 중반까지, 주인공 준경과 아버지는 자꾸만 어딘가 어긋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준경은 마을에 간이역을 설치하기 위해 행동하지만, 기차 기관사인 아버지는 정해진 역이 아닌 곳에서의 정차는 원칙에서 벗어난다며 그 행동을 외면한다. 그러다가 이 둘의 관계가 탁! 풀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준경이 꿈을 위해 시험을 보러 서울에 가는 장면이다.
어머니와 누나가 세상을 떠나고 - 남은 아들과 아버지는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각자의 사연으로) 깊이 나누지 못했다. 준경이 간이역을 만들었을 때도, 유학을 가지 않겠다고 할 때도,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의 마음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 어떻게든 아들의 꿈을 지켜주고자 하는 의지는 강했다. 직접 서울까지 밤샘 운전을 해가며 준경이 시험을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서툴고 투박하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의 표현하는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누나와의 기억을 지키려는 준경의 마음]
누나 보경이 누구보다 동생을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으로 이 영화는 시작한다. 보경은 준경의 곁에서 속내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머무는데, 사실 그 모습은 환영이다. 준경이 어렸을 적에 먼저 세상을 떠난 보경은 준경의 곁에서 든든한 조력자이자 보호자가 되어주었고, 준경은 그런 누나가 언젠가 사라질까 봐 유학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한다. 그 마음은 준경이 그토록 간이역 개설에 집착하는 이유를, 그 행동의 동기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누나와 아버지의 응원에 힘입어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날, 준경은 비로소 눈물의 이별을 나눈다. 동생의 인생과 꿈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누나의 마음과 그런 누나를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이 만나 아름답게 연출된 장면이었다.
지키고자 한 것들을 각자의 방법으로 지키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옛 것도, 누군가의 마음도 지키려고 하지 않으면 눈 깜빡할 새에 흐려지겠구나 싶어 아련, 씁쓸해졌다. 2022년이 되면서 변화를 맞은 건 명절만이 아니다. 비대면 문화 속 분명 우리가 놓치고 있는 소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열심히 변화하고 적응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지키려는 마음도 같이 가진다면 좀 더 삶이 조화로워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