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마음에 드는 소리

시작하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내가 되어야 하는 이유

by Funny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이 아니다. 그래서 매주 무언가 이벤트가 있다기 보다는, 가끔 이벤트, 행사, 무료공연이 있다.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지는 않지만 한국 사회가 또 정과 커넥션의 사회이다보니 SNS를 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무료공연의 정보가 오고는 한다.


쇼팽, 무료 공연. 잘 매칭이 되는 조합은 아니다. 쇼팽의 곡을 피아노로 친다는 것은 피아노를 가지고 있는 전문 공연장을 빌린다는 것이고, 무료공연이라고 해도 홍보와 인력을 필요할테니, 관람은 무료라 해도 공연을 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경제적인 압박이 있을 것이다. 왜, 어떻게, 무료일까? 라는 강한 궁금증이 공연을 신청하게 했고, 비루한 주차실력이지만 어찌저찌 주차까지 해서 공연을 보러 갔다.


결론적으로 공연은 엄청났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것이 있었다. 그 어떤 잘치는 피아니스트보다도, 예매하지 못한 임윤찬 공연이 아니라면 이만큼의 인사이트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한 줄평을 해보자면,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나는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 않다. 그냥 호기심 많은 알고리즘의 노예이다. 알고리즘에 뜬 임윤찬씨의 연주에 감탄하며 임윤찬씨의 공연이라면 죽기전에 한번은 가고싶다고 생각하는, 손이 느린 사람이다. 아는 곡도 많지 않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 몇몇주자는 듣다가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학예회도 이렇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무대공포증을 가지고 있고 머리가 새하얘저서 피아노를 치다가 망한 경험을 초등학교 1학년때 가지고 있고 지금도 무대에 서면 통으로 날아가는 일이 있는 사람으로서, 혹시나 그분이 그랬을 경우,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연습부족으로 보였고, 음을 연결하는 사이에서 망설임이 보였다. 주차를 하며 4번을 왔다갔다하고, 오후에 좋은 곳에서 차를 마시다 자리를 박차고 모임을 파한 이유는, 이런 뚱땅뚱땅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런 형편없는 관객모독 수준의 연주를 공연장에서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공연이라함은, 경연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의 기능을 가진 사람이 어느 정도의 수준의 기능을 선보이기로 사회적인 합의가 있지 않은가. 무료 공연을 위해 연습한 연주자에게 감사함을 가지지 못하고 분개하는 나의 마음을 보면서 현대의 공연자는 참 힘들겠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이런 연습만도 못한 허접함도 공연이라고 사람을 모아놓고 비싼 돈을 들여서 근사한 공연장까지 해서 진행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아직도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실력은 있지만 태도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늘 과한 드레스나 질이 나빠보이는 드레스를 보면, 저렇게 까지 해서 드레스를 입고 공연을 해야 할까? 그냥 단정한 옷을 입고 하면 안되나? 라는 의문을 가지고는 했다. 그러나 막상 일반 상점에서 팔듯한 미니 원피스를 입고 등장해서 연주용 피아노를 독주하는 연주자를 보니, 아무리 괜찮은 연주를 했다고 해도 의상이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본인의 의중과 가치관과는 무관하게 폄훼 된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 현대사회에 드레스라니, 낭비이고 필요는 없다. 그 필요 없는 것을 신성하게 여기고 따르는 그 모습이 그 사람이 어떻게 이 연주를 대하고 있고, 얼마나 희생하는 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그 속에 든 마음은 볼 수 없으며, 이 연주자가 드레스 대여 비용이 아까워 평상복을 입고 왔다는 사실만 보인다.


반면, 이런 자리에 이렇게 있으실 분이 아닌데 하는 클라스를 보여주신 연주자 분이 있었다. 반짝반짝한 예쁜 드레스를 입고 앉아서 피아노를 칠 때, 남성들이 파워풀하게 연주하지 여성들의 연주는 멕아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나의 편협한 생각을 날려버리는 파워풀함과 부드러움, 웅장함, 여유로움, 조화로움, 자연스러움, 모든 것이 발란스좋게 다 있었다. 시카고 홀에서 듣는 세계 경연 1위를 몇번한 사람의 피아노 연주보다도, 개인적으로는 더욱 멋진 연주였다. 이 사람의 연주가 앞에서 흘러내리는 드레스의 소매를 올리며 음박자를 놓치는 연주자와 같은 무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연주자도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안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피아노를 치고 들어가는 연주자의 뒤돌아서는 꼴과 태에서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


한사람의 힘을 무시하고는 했다.

나하나 열심히 산다고, 이 음하나, 이 문서하나, 이 리뷰하나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라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러나 음 하나하나를 고민하고 타협하지 않는 연주자의 연주는 아무리 무명의 대학 출신이이라도, 아무리 학생이라도 뚫고 나왔으며, 존중없이 노력없이 무대에 서는 연주자의 연주는 석사고 학사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 한명의 무례함만으로도 연주회의 격을 초등학교 학예회로 만들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다는 말은 이런 것 같다. 나만 아는 나의 노력과 나의 고집은 언젠가는 무언가의 형상이 되어, 어떤 느낌을 가지고, 그 느낌은 어느 정도를 벗어나면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진다. 그것이 필수적이지 않고, 굳이의 영역일 때 더욱 그럴 수 있다. 타협하는 것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타협하는 정도의 것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할 짓이 아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하와이는 천국인가